쓰누가아라시토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 혹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우시키아리시치칸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 가야의 왕자이다.[1]
쓰누가아라시토
都怒我阿羅斯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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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왕자 |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성별 | 남성 |
왕조 | 가야 |
기록
편집《일본서기》에는 스이닌 천황(垂仁天皇) 2년조의 주석으로 2개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으며, 소나갈질지 설화의 뒤에 뒤이어 나온다.[1]
첫번째는 스진 천황(崇神天皇) 대에 이마에 뿔이 자란 쓰누가아라시토가 배로 아나몬(穴門)에서 이즈모국(出雲国)을 지나 고시국의 케히우라(笥飯浦)에 왔다고 한다.[1] 그리고 이것이 '쓰누가(角鹿)' 지역의 어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쓰누가(角鹿)라는 지역의 이름은 후에 쓰루가(敦賀)로 전화되었다.
3년 뒤 11대 스이닌 천황은 쓰누가아라시토가 귀국할 때에 선대 스진 천황 휘인 '미마나(任那, 弥摩那, 彌摩那)'를 국명으로 하라고 조서를 내렸으며,[1] 적견(赤絹)을 하사했다. 쓰누가아라시토는 의부가라국왕(意富加羅國王; 오호카라노쿠니)의 아들이었는데 이 교를 받은 까닭에 나라의 이름을 미마나(임나)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천황이 선물한 비단은 신라인이 이를 듣고 병사를 일으켜서 모두 빼앗았다. 이 일로 이후 신라와 임나는 불화하게 되었다고 한다.[1]
一云…仍以赤織絹給阿羅斯等, 返于本土. 故, 號其國謂彌摩那國, 其是之緣也. 於是, 阿羅斯等以所給赤絹, 藏于己國郡府. 新羅人聞之, 起兵至之, 皆奪其赤絹. 是二國相怨之始也.
— 垂仁天皇紀
두번째 전설에서 아라시토가 국(國)에 있었을 때에 누런 소에 대한 댓가로 얻은 백석(白石)이 아름다운 동녀(童女)로 화화하였기에, 쓰누가아라시토는 동침하려 하였다.[1] 그러자 동녀는 쓰누가아라시토를 떠나 일본으로 갔고, 나니와(難波)와 함께 도요쿠니(豊国)의 구니마에군(国前郡)의 히메가타리소샤(比売語曽社)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1] 쓰누가아라시토는 동녀를 쫒아 일본까지 건너갔다.
또한 두번째 전설의 관련 전승이 《고사기》의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天日槍)・아카루히메노카미(阿加流比売神) 설화나 《셋쓰국풍토기(摂津国風土記)》의 일문(逸文)(《萬葉集註釈》所引)에 보인다.[2]
고증
편집'쓰누가'라는 이름은 신라 최고 관직인 '서불한(舒弗邯)' 즉 각간(角干)을 훈독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한 이 쓰누가가 와전되어 쓰루가(敦賀)라는 지명이 나왔다고도 한다.[3] 또한 '아라시토'는 한국어 '알지(閼智)'[4]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라와 가야의 귀족에 대한 경칭으로 보기도 한다.[5][6][3] 쓰루가에는 식내사(式内社)로서 시로키신사(白城神社)•시로키히코신사(信露貴彦神社)라는 신라계 신사도 분포하고 있으며,[7] '쓰누가아라시토'의 이름이나 설화를 아울러, 한반도 남부에서 쓰루가 지역 주변으로 이어지는 도래인(渡来人)의 내방과 정착이 있었음을 시사한다.[6] 기원전 1세기의 쓰누가라는 인물에 대하여 기원후 6세기 일본측에서 기록한 탁순국의 아리사등(阿利斯等), 기능말다간기(재위:?~538년) 와 동일시되는 설도 있으나 탁순국의 아리사등은 기원전 1세기 쓰누가아라시토(소나갈질지)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400년 이상 지난 6세기 인물로 일본으로 건너가 영주가 된 인물이며 탁순국 아리사등 후손들이 아리사등과 기원전 1세기 인물인 쓰누가를 동일시하여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1]
또한 두 번째 전설에 보이는 '히메가타리소샤(比売語曽社)' 가운데 나니와의 신사는 히메고소신사(比売許曽神社,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소재, 식내명신대사式内名神大社)와 도요쿠니(豊国)의 구니마에군(国前郡)의 신사는 히메가타리소샤(比売語曽社, 오이타현 히가시쿠니히가시군東国東郡 히메시마무라姫島村 소재)로 비정된다.[1] 두번째 전설은 아메노히보코 전설과 같은 전설의 다른 버전으로 보고,[1] 동일한 신에 관한 전승으로 보고 있디.[8] 아메노히보코(天日槍)라는 이름 자체가 상술한 '쓰누가(각간)아라시토(알지)'의 일본이름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8] 그리고 이런 전설에 아메노히보코는 신라 왕자, 쓰누가아라시토는 대가야 왕자라고 하지만 이는 한반도 유래 전승이 일본에서 특정 쿠니에 할당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8]。
쓰누가아라시토는 '우사기아리질기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라는 이름으로도 표기되는데 일본어 발음으로 '우시키아리시치칸키(うしきありしちかんき)'라고 표기된다. '우시(于斯)' 는 즉 '우시(牛, 소)'의 고대 한국어이며 '키(岐)' 는 존칭을 뜻하는 '貴', 질지(叱知)는 가야의 왕족 등급인 질지 또는 일본어로 부(父,ちち,치치)를 뜻하고 칸키(干岐) 또한 '키(岐)'는 존칭을 뜻한다. 쓰누가아라시토 전승에서 등장하는 '오호카라(意富加羅)'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금관가야(金官伽耶)로 보기도 하며,[9] '오호'를 크다(大; 오오)는 의미로 보아 대가야로 해석하기도 한다.[10]
전승
편집게히신궁(氣比神宮, 후쿠이현 쓰루가시)의 전승에서는 쓰누가아라시토가 쓰루가의 통치를 담당했다고 한다.[11] 또한 게히신궁 경내 섭사(摂社, 신사의 주신과 연관된 신을 봉헌한 건물)의 쓰루가신사(角鹿神社, 식내사(式内社))는 그 정소적(政所跡)이며, 현재 쓰누가아라시토는 제신(祭神)으로 여겨진다.[11]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都怒我阿羅斯等(古代氏族) & 2010年.
- ↑ 谷川健一 『日本の神々(岩波新書618)』岩波書店、1999年、pp. 180 - 186。
- ↑ 가 나 上田正昭『私の日本古代史 上』新潮選書、2012年、p. 298。
- ↑ 人物名としては新羅・金氏王統の始祖とされるが、「閼智」には敬称としての「知恵者」の意味もあるとされる。
- ↑ 『国史大辞典』敦賀郡項。
- ↑ 가 나 渡来文化と地域間交流(県史) & 1993年.
- ↑ 渡来の神々(県史) & 1993年.
- ↑ 가 나 다 松前健 『日本神話の謎がよく分かる本』 大和書房、2007年、pp. 220-221
- ↑ 日韓共同歴史研究会「日韓共同歴史研究報告書」(第1分科会、2010年)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j.pdf
- ↑ 李丙燾(이병도),「蘇那曷叱智考(소나갈질지고)」, 『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 博英社(박영사), 1976, p. 340
- ↑ 가 나 氣比神宮由緒書。
- ↑ “県道敦賀港線 ‐28‐” (PDF). 福井県. 2023년 8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