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단

아사카단(일본어: () (さか) (だん) 아사카단[*])은 815년부터 10세기까지 일본 무츠국에 배치된 군단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아사카군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15년(고닌 6년) 8월에 무츠국에 4개 군단을 늘리면서 아사카단이 설치되었다. 이후 무츠국에는 6개 단 6,000 명이 6교대제로 상시 1,000 명 병력을 주둔하게 되었다.[1] 아사카단은 시라카와단, 나메카타단과 함께 상시 500명씩을 내어 다가성국부에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각 단의 표준 정원은 1,000 명이었다. 이후 이와키단이 추가되면서 7개 단 7,000 명이 되었고,[2] 843년(조와 10년)에 1,000 명을 증원했다. 그 이후 병력은 알 수 없지만 계속 다가성을 수비했다.[3]

연대는 불명하지만, 아사카단 아이즈군의 병사들이 교대근무를 마치고 타마사키관[4] 통해서 아이즈로 귀향한 것이 보고된 목간이 발견되어 있다.[5] 정확히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습서되었고, 다가성에서 서면폐기된 것 같다.[6] 이것은 부병제 군제였던 고대 일본 군단병의 교대근무가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며, 나카도리의 아사카단에 아이즈 출신 병사들이 속해 있던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른 군단들의 배치까지 고려해 보면 아사카군, 노부오군, 아이즈군 3군의 백성들로 아사카단을 편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7]

10세기 연희식에도 무츠국에 7개 단을 배치할 것이 규정되어 있으며, 군단 구성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8] 11세기에 폐하였다.

참고 자료편집

  1. 類聚三代格』巻第十八。黒板勝美・編『類聚三代格(後編)・弘仁格抄』551-552頁。
  2. 続日本後紀』承和10年4月19日条。
  3. 간교 연간(877년-884년)의 태정관부에 진수부를 수비하는 군의가 15인, 국부를 수비하는 군의가 20인으로 되어 있다. 전자를 3개 군단, 후자를 이와키단을 더한 4개 군단이라면, 나누었을 때 5명씩으로 딱 떨어진다. 平川南『漆紙文書の研究』282頁。
  4. 木簡には「玉前剗」。
  5. 『多賀城市史』第1巻252頁。高倉敏明『多賀城』104-105頁。平川南『東北「海道」の古代史』134頁。『多賀城跡木簡』II、第370号木簡、56頁。同じく図版編では35-37頁。
  6. 『多賀城跡木簡』II、第370号木簡、57頁。
  7. 『多賀城市史』第1巻253頁。
  8. 하시모토 유타카(橋本裕)는 변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律令軍団一覧」、『律令軍団制の研究』(増補版)159-160頁).
  • 黒板勝美編『新訂増補国史大系 類聚三代格(後編)・弘仁格抄』、吉川弘文館、普及版1971年。初版1934年。
  • 高倉敏明『多賀城 古代国家の東北支配の要衝』(日本の遺跡30)、同成社、2008年、ISBN 978-4-88621-452-2
  • 多賀城市史編纂委員会『多賀城市史』第1巻(原始・古代・中世)、多賀城市、1997年。
  • 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多賀城跡木簡』II(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資料 III)、2013年。
  • 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多賀城跡木簡』II・図版編(宮城県多賀城跡調査研究所資料 III)、2013年。
  • 橋本裕「律令軍団一覧」、『律令軍団制の研究』(増補版)、吉川弘文館、1990年(初版は1982年発行)、ISBN 4-642-02244-9 に所収。論文初出は『続日本紀研究』199号、1978年10月。
  • 平川南『漆紙文書の研究』、吉川弘文館、1989年、ISBN 4-642-02232-5
  • 平川南『東北「海道」の古代史』、岩波書店、2012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