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전쟁

19세기에 청나라와 대영 제국 간의 전쟁

아편전쟁(阿片戰爭, 영어: Opium Wars)은 19세기 중반에 대영 제국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값싼 인도산 아편을 밀수하였고, 이 결과로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아편전쟁(阿片戰爭)

영국 동인도회사의 증기선 네메시스가 청나라 정크선을 파괴하는 모습
날짜제1차: 1840년 - 1842년
제2차: 1856년 - 1860년
장소
청나라 동부 해안
결과

서양 열강의 승리
불평등 조약 체결

러시아 제국의 연해주 획득
영국의 홍콩주룽반도 획득
프랑스의 광저우만 조차

중국의 반식민지화
교전국

1839-1842

대영 제국의 기 대영 제국

1840-1842

청나라의 기 청나라

1856-1860
대영 제국의 기 대영 제국

인도 제국의 기 인도 제국

프랑스 프랑스
미국 미국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1856-1860

청나라의 기 청나라
지휘관

1840-1842
영국 빅토리아 여왕
영국 파머스턴 경
영국 찰스 엘리엇
영국 조지 엘리엇
영국 앤서니 스트랜샴


1856-1860
영국 빅토리아 여왕
영국 마이클 세이무어
영국 제임스 브루스
프랑스 나폴레옹 3세
프랑스 장밥티스트 그호
프랑스 오귀스트 L. 포테
미국 제임스 뷰캐넌
미국 조시아 타트네일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2세

1839-1842
청나라 도광제
청나라 임칙서
청나라 치샨
청나라 관천배


1856-1860
청나라 함풍제
청나라 혁흔
청나라 엽명침

청나라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흔히 대영제국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기 전까지는 중국이 아편에 무지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아편은 명나라시대부터 황실, 귀족, 관료들이 즐기고 있었다.[1] 이미 청나라 최전성기인 옹정제 시대에 일반인들이 아편을 흡연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었다.[2] 대영제국은 저렴한 인도산 아편으로 중국 아편가격을 폭락시켜, 사회최하층까지 아편에 손을 대게 함으로써 사회기반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

이에 청나라 도광제임칙서광동성에 파견하여 아편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며 영국에 참패하였다. 제2차 아편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참전하여 수도 베이징까지 약탈유린당했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완패함으로써 중화사상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점점 진출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개막된다.

아편전쟁의 배경 편집

중국 아편의 역사 편집

중국의 아편은 당나라 시대에 아랍에서 들어와서 약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 시대가 되면서, 아편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3]

명나라 9대 황제 효종(1487~1505) 때는, 아편이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욕을 일으키는 미약(媚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명나라 시대의 방중술과 육보단 등으로, 성을 기교 측면에서 주로 연구하고 탐닉한 결과였다.[4] 이후 황실과 상류층에서 아편은 회춘약과 미약으로 유행하였다. 실제로 명나라 만력제의 유골에서는 아편의 주성분인 모르핀이 다량 검출되었다.[5] 만력제 때인 1572년에는 마카오가 금, 은, 도자기과 함께 아편을 무역할 수 있도록, 중앙 조정에서 승인까지 해주었다.[6]

청나라 시대의 아편 편집

청나라 초기에는 여전히 아편이 명나라처럼 황실과 상류계층에서만 유행하였다. 그래서 아편은 부와 교양의 상징처럼 여겨졌다.[7]

16세기에 담배가 도입되면서 무엇을 피우는 문화가 중국에 도입 된다. 17세기가 되면 담배는 중국 노동자들에게 보급될 만큼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청나라 내에서의 아편 경작 면적은 점점 늘어나서, 아편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선망의 대상인 아편은 사회각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8] 청나라는 이미 옹정제 때 아편의 폐해를 알고, 일반인들이 아편을 흡연하지 못하게 금지시키기도 했었다.[9]

영국의 무역 적자 편집

처음에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발명한 방직기계에서 생산한 면직물을 청나라에 판매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인구를 가진 청나라였기에, 그들이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한 면직물이 영국산 기계 면직물보다 오히려 저렴했다. 그리고 영국의 일반가정은 월수입의 5%를 차 구매에 사용했는데,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 규모의 90%를 차가 차지하면서, 영국의 적자는 늘어갔고 막대한 영국의 은이 청나라로 유입되었다.[10]

이에 영국은 무역적자를 타개할 목적으로, 값싼 인도산 아편을 축구공 모양으로 만들어 약상자에 넣어 밀무역으로 청나라에 유통시켰다. 명목상 청나라에서 아편은 약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11]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면 1,000배의 이익이 남을 정도로, 인도의 아편은 저렴했다.[12] 이에, 청나라의 아편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고 사회 최하층까지 아편에 손을 대게 되면서,[13] 사회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아편 수입량은 1770년대에 연평균 200상자였다. 그러다 1838년에는 1년에 4만 상자까지 수입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편 중독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1800년 이전에 3억명 중에 아편중독자가 10만명이었지만, 1839년에는 1,000만 명이 사용할 아편이 수입되었다. 참고로 아편전쟁 후에도 아편중독자는 계속 늘어나서, 20세기 초에는 4,000만 명이 아편에 중독되었다.[14] 그리고 국민당 정부 시절에는 상하이 시의회 등 정부가 아편을 공급하기까지 했다.[15]

청나라의 대응 편집

 
호문소연(虎門銷烟). 아편을 폐기하는 임칙서.

1838년 12월 31일 도광제는 아편문제 해결을 위해서,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과 광동수사로 삼았다.[16] 참고로 도광제는 아들 3명을 아편중독으로 잃었던 인물이다. 이때가 되면 청나라 어전회의 도중에 대신들이 아편을 피울 정도였다.[17]

임칙서는 아편 21,306상자를 압수해 폐기하고, 마약상인 60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영국상인들에게 아편무역을 중단할 것과 아편밀매를 하면 자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을 시키겠다고 했다. 그리고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행동이 어쩔 수 없었음과 아편무역에서 영국이 손을 떼도록 호소했다.[18]

천비해전 편집

임칙서가 영국 아편을 폐기한 후에, 영국 해군 수병이 중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청나라는 마카오에서 영국인들을 추방했다.[19]

제1차 천비해전 편집

1839년 11월 3일에 중국 광동성 주강하구 호문(虎門) 해협의 입구에서 일어난 해전이다. 영국의 작은 무장상선 2척과 청나라 정크선 29척이 싸웠는데, 청나라 정크선 26척이 파괴되었다. 이에 흠차대신 임칙서는 서양화포 300문을 사서 강안포대에 배치하여 주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미국제 철제 증기선까지 사들였다.[20]

영국의회의 아편 전쟁 참전 가결 편집

영국은 천비해전을 통해 청나라 군대가 형편없음을 알아챘고, 아편전쟁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러나 영국의원들 사이에서도 아편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부정적이기도 했다. 전쟁을 위한 예산 표결이 271대 262표로 가결되자, 후에 영국수상이 되는 토리당 의원 글래드스턴은 영국양심의 무게가 고작 262표냐라고 비판했다.[21][22]

제1차 아편전쟁 편집

1840년 6월 여름에 전쟁은 본격화 되었다. 11월에는 청나라가 영국에게 대패했다. 청나라는 임칙서를 면직시키고, 기선(琦善)에게 강화교섭을 맡겼다. 영국은 함선 48척과 군인 4,100명이 베이징의 통로인 다구(大沽)와 천진(天津)을 위협하며, 총독 기선(琦善)과 협상했다. 그러나 합의가 불발되자, 전쟁은 재개됐다.[23]

제2차 천비해전 편집

1841년 1월 7일 오전 8시에서 중국 주강 하구에서 일어난 해전이다. 영국 해군 함대가 청나라의 대형 정크선 함대를 물리치고, 임칙서가 만든 포대 11개를 무력화시켰다. 전투는 4시간 만인 정오쯤에 끝나버렸다. 영국군의 피해는 부상 38명 뿐이었지만, 청나라는 사망 277명, 부상 467명, 포로 100명이었다. 청나라 흠차대신 기선(琦善)은 아편 배상금 600만냥, 청나라의 핵심 항구 5곳 개항, 홍콩 할양 등을 포함한 '천비가조약(川鼻假條約)' 을 체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광제는 '서양오랑캐에게 은은 하사할 수 있으나, 영토를 내어줄 수는 없다'고 하였다.[24] 결국 기선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귀양보내졌다.[25]

난징조약 편집

1841년 3월 15일 광저우에 청나라 백전노장인 참찬대신(參贊大臣) 양방이 왔고, 전투가 재개됐다. 청나라는 사흘만에 영국에게 전함 수십척이 침몰당하고, 대포 400문을 빼앗겼다. 양방은 서양의 눈부신 군사기술을 술법으로 여겼다. 그는 부녀자의 소변을 모으고, 호랑이 날과 시에 태어난 장수를 모았지만 소용 없었다. 3월 20일에는 영국의 압박에 밀려 도광제 몰래 통상까지 허용해줬다. 도광제는 양방의 거짓보고에 속아 승리를 하고 있다고 착각했다.[26]

도광제는 적을 섬멸해버리라며, 위내대신 겸 어전대신이던 혁산을 내려보냈지만 연패를 거듭했다. 결국 혁산은 5월 26일 광저우성에서 영국에게 항복하였고, 청나라군을 광저우 밖 200리 이상으로 물리고 일주일 이내에 600만냥을 바치기로 하였다. 그는 자비까지 털어서 이틀이나 배상금을 빨리 납부했다. 그러나 도광제에게는 승리를 하여 성을 되찾았다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27]

결국 1841년 8월에 아편전쟁은 재개되었고, 영국군 1만명은 광둥성을 초토화시키고 양쯔강으로 북상했다. 1842년 3월에는 청나라 혁산이 4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 1,000명에게 대패한다. 1842년 6월에는 상하이, 1842년 7월에는 난징의 핵심기지인 진강까지 함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맺게 된 조약이 난징조약이다.[28]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29]
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ㆍ상하이 등 5항(港)을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4. 전쟁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한다.
5. 독점상인을 없앤다.
6.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7.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한다.

제2차 아편전쟁 편집

영국의 불만 편집

영국의 청나라에 대한 무역은 제1차 아편전쟁 후에도 여전히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아편의 자체생산을 늘리고, 난징조약에서 관세를 제한해준 덕분에 자유무역의 효과가 생겨 청나라 차의 영국 수출량이 오히려 증가되어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면직물은 청나라의 것이 품질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기에,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시작되었다. 또한 광둥성에서 대영항쟁까지 전개되고 있었다.[30]

애로호 사건 편집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정부가 애로호라는 청나라 배를 단속하였다. 애로호가 해적질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 청나라 사람이었지만, 선주가 영국인이었다. 영국은 청나라가 애로호 단속 과정에 영국국기를 바닥에 던져 모욕했다며, 다시 전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사후조사에서 영국국기는 발견되지도 않았다.[31]

영국하원은 전쟁을 부결시켰고, 제1차 아편전쟁을 비판했던 글래드스턴(Gladston)은 정부 불신임안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수상이었던 파머스턴(Palmerston)이 하원을 해산시키고, 투표를 통과시켰다.[32]

열강들의 참전 편집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빌미로 전쟁에 참가하기로 했다. 여기에 러시아와 미국까지도 참전의사를 밝혔다.[33]

톈진조약 편집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광저우(廣州)를 침략한 후,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북상했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 남경까지 함락된 상황이라 서양군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때, 러시아까지 청나라 영토 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열강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하고, 1858년 6월 톈진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4]
1. 아편무역의 합법화
2. 전쟁배상금 지불
3. 개항 항구 확대
4. 베이징에 외국 외교관 상주 허용
5. 기독교 공인
6. 중국 노동자 수출
7. 장강 통행
8. 외국인 중국 내륙 여행 자유화

다구포대 전투 편집

톈진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청나라의 후속조치가 미흡하다는 핑계로 계속 진격하여 1859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다. 이때, 다구포대의 청나라군이 대포를 발사하여, 영국과 프랑스 함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였다.[35]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병력을 증강하여, 1860년에 영국군은 173척의 함대에 2만명, 프랑스군은 33척의 함대에 6,300명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발해만의 주요 항구를 초토화시켰고, 다구포대로 가서 복수했다. 그리고는 톈진에 상륙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함풍제와 신하들은 열하로 피신했다.[36]

팔리교 전투 편집

 
팔리교 전투

베이징에서 30리 떨어진 팔리교 방어에 나선 청나라 장수는 몽고 출신의 49세 장군 승격림심(僧格林沈)이었다. 그는 태평천국운동 반란군을 진압하며, 당시 청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대접받았다. 청나라의 총 병력은 27,000명이었고, 이중에서 몽골기병이 중심이 된 기마병이 12,000명이고 보병이 15,000명이었다. 반면, 영국은 4,000명, 프랑스는 8,000명으로 청나라의 군대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승격림심의 기마대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향해 돌격했으나, 대포와 라이플 소총에 쓰러져갔다. 몇 시간 만에 전투가 끝났고, 청나라는 12,000의 기마병 중에 10,000명이 전사하고 2,000명이 살아남았다. 반면 영국군은 2명, 프랑스군은 3명이 전사하여 서양군대는 총 5명만 전사했다.[37]

베이징 조약 편집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어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나라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원명원은 청나라 황제에게 바친 진상품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였다. 그리고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결국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텐진조약에 더하여, 개항 도시를 늘리고, 전쟁배상금도 늘어났으며, 영국에 홍콩을 할양했다. 그리고 러시아에게 연해주까지 빼앗겼다. 참고로 제2차 아편전쟁으로 얻은 청나라의 유일한 이득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것이다. 청나라와 서양 열강이 협력하게 되자, 홍수전은 두려움에 자살하고 남경이 함락되고 태평천국은 멸망해버렸다.[38]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아편, 淸이후 지위·여가 상징물로 토착화'. 《서울경제》. 서울경제. 2009년 2월 6일.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명나라초까지만 해도 약으로 사용됐던 아편은 이때부터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욕을 일으키는 미약(媚藥)으로 은밀하게 사용됐다. ~~~ 명나라 9대 황제 효종(1487~1505) 시대에는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아편이 '미약'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방중술'과 '육보단' 등 이른바 성의 기교에 관한 연구와 탐닉이 명대에 번성했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2. 주, 경철 (2008년 4월 11일). “중국 부 유출·아편전쟁 일으킨 ‘유사화폐’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28. 아편”. 《한겨레》. 한겨레 신문사.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이미 옹정제(1678~1735) 때 아편의 폐해를 인식하고 일반인의 아편 흡연을 금했었고 
  3. “아편 (阿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때에 아랍으로부터 양귀비가 들어왔으나 약용으로만 사용되어 오다가 명나라 때에 와서 흡연에 의한 아편중독이 문제되기 시작하였다. 
  4. '아편, 淸이후 지위·여가 상징물로 토착화'. 《서울경제》. 서울경제. 2009년 2월 6일.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명나라초까지만 해도 약으로 사용됐던 아편은 이때부터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욕을 일으키는 미약(媚藥)으로 은밀하게 사용됐다. ~~~ 명나라 9대 황제 효종(1487~1505) 시대에는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아편이 '미약'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방중술'과 '육보단' 등 이른바 성의 기교에 관한 연구와 탐닉이 명대에 번성했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5. 윤, 민용 (2009년 2월 6일). “淸의 아편 탐닉, 결국 몰락의 길로”. 《경향신문》. 경향신문.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황실에서는 아편을 방중술의 비약으로 여기며, 몸을 회춘하게 만든다 해서 춘약(春藥) 혹은 성욕을 일으킨다 해서 미약(媚藥)으로 불렀다. 실제로 명말 재임한 만력제의 유골에는 다량의 모르핀 성분이 함유돼 있었다. 상류층 사이에 유행하던 아편은 18세기 사회 각층에 침투한다. 
  6. 채, 인택 (2022년 12월 29일). '황제 파업'이 탄생시킨 차이나타운...세계 모든 대륙에 있다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만력제가 즉위한 1572년부터는 중앙 조정의 승인도 받아 금·은과 도자기·아편 등을 무역할 수 있게 됐다. 
  7. 윤, 민용 (2009년 2월 6일). “淸의 아편 탐닉, 결국 몰락의 길로”. 《경향신문》. 경향신문.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상류층 사이에 유행하던 아편은 18세기 사회 각층에 침투한다. 여기에는 명청대 발달했던 소비문화·여가문화도 한몫했다. 당시 아편은 부를 지닌 유한계급과 여유있고 교양있는 이들의 상징이었다. 소수 유한계급의 취향은 곧 사회구성원 다수가 선망하는 유행의 대상으로 변모하곤 한다. 
  8. '아편, 淸이후 지위·여가 상징물로 토착화'. 《서울경제》. 서울경제. 2009년 2월 6일.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아편이 중국 전역으로 펴진 것은 16세기 중엽에 도입된 담배의 영향이 컸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17세기 들어 중국의 노동자들에게도 보급될 만큼 담배가 일반화하면서 중국인들은 식습관을 허기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취향의 맥락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같은 '피우는(煙) 문화'는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확산돼 담배와 아편의 흡연은 지위와 여가 활동을 상징하게 된다. 10세기 중국 내에서 늘어나는 아편 경작은 가격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고, 최하층 사회 구성원들까지 아편에 손을 댈 수 있게 만들었다. 
  9. 주, 경철 (2008년 4월 11일). “중국 부 유출·아편전쟁 일으킨 ‘유사화폐’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28. 아편”. 《한겨레》. 한겨레 신문사.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이미 옹정제(1678~1735) 때 아편의 폐해를 인식하고 일반인의 아편 흡연을 금했었고 
  10. 어, 기선 (2023년 8월 29일). “[역사속 오늘리뷰] 8월 29일 난징조약 체결”. 《파이낸셜 리뷰》. 파이낸셜 리뷰.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영국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기계에서 뽑아낸 면직물을 청나라에 수출하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가내 수공업이 초기 산업혁명을 뛰어는 가격 경쟁력을 자랑했다. 즉, 영국의 기계에서 뽑아내는 면직물보다 청나라 백성들이 생산하는 면직물의 가격이 더 저렴했다. 따라서 청나라 시장에 풀린 영국산 면직물은 청나라 백성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청나라에서 생산한 ‘차(茶)’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일반 가정의 월수입 중 5%를 차 구매에 사용했을 정도이고, 중국 무역의 90%가 차였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은(銀)이 중국으로 막대하게 유입됐다. 
  11. 김, 동욱 (2022년 9월 19일).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아편은 서구제국의 고수익 사업…중국 4000만명 중독”. 《생글생글 769호》. 한국경제신문.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에서 대량으로 아편을 재배한 뒤 검은색 축구공만 한 크기로 만들어 ‘약’이라고 쓰인 나무 상자에 넣어 중국으로 밀수했다.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볼링공 모양으로 만들어서 대량으로 공급한 것이다. 중국에서 아편은 약품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2. 서, 양자 (1997년 9월 14일). “[중국 가톨릭 박해사] (20) 아편전쟁 후의 천주교-불평등 조약 시기 (1)”. 《가톨릭신문》. 가톨릭신문.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인도에서 아편을 가져와 중국에 판매하여 1천 배의 이익이 남을 뿐만 아니라 흡식하면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13. '아편, 淸이후 지위·여가 상징물로 토착화'. 《서울경제》. 서울경제. 2009년 2월 6일.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최하층 사회 구성원들까지 아편에 손을 댈 수 있게 만들었다. 
  14. 김, 동욱 (2022년 9월 19일).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아편은 서구제국의 고수익 사업…중국 4000만명 중독”. 《생글생글 769호》. 한국경제신문.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중국의 아편 수입량을 보면 1770년대 연평균 200상자였던 것이 1780년대엔 연평균 1000상자로 증가했다. 1800~1809년 3871상자이던 아편 거래가 1811년에는 5000상자를 넘었다. 이는 또다시 1820~1829년에 1만311상자로 늘었고, 1830~1839년에는 2만2941상자로 급증했다. 1838년 한 해에만 4만 상자 이상이 쏟아져 들어왔다. ~~~ 1800년대 이전에는 3억 명 인구 중 아편 중독자가 10만 명 수준으로 견딜 만했다. 하지만 1818년, 싸고도 효과가 강력한 파트나 아편이 개발되면서 1839년엔 1000만 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양의 아편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9세기 초반에는 청나라 조정 대신들까지 어전회의 도중에 아편을 몰래 피우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황제인 도광제조차 세 아들을 아편 중독으로 잃었다. 20세기 초 중국의 아편 중독자 수는 4000만 명 수준으로 늘었다. 
  15. '아편, 淸이후 지위·여가 상징물로 토착화'. 《서울경제》. 서울경제. 2009년 2월 6일.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상하이 시의회 등 정부가 아편을 공급하면서 
  16. 어, 기선 (2022년 4월 21일). “[역사속 경제리뷰] 아편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파이낸셜 리뷰》. 파이낸셜 리뷰.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결국 1838년 12월 31일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과 광동수사로 삼았다. 
  17. 김, 동욱 (2022년 9월 19일).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아편은 서구제국의 고수익 사업…중국 4000만명 중독”. 《생글생글 769호》. 한국경제신문.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19세기 초반에는 청나라 조정 대신들까지 어전회의 도중에 아편을 몰래 피우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황제인 도광제조차 세 아들을 아편 중독으로 잃었다. 
  18. 김, 기철 (2023년 7월 4일). “중국을 2000년 무역흑자국 만든 ‘이것’…나라 망하게도 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매일경제》. 매일경제.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임칙서는 마약상 60명을 체포하고, 영국 상인들에게 “아편 무역을 중단할 것”과 “‘밀매하다가 적발될 경우 자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것을 각오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특히 그는 아편 2만 1306상자를 압수해 전량 폐기처분했다. 임칙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무역에서 영국이 손을 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영국에 아편을 가져와 영국인들이 아편을 피우도록 부추긴다면, 여왕께서도 크게 분노하시며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19. 어, 기선 (2022년 4월 21일). “[역사속 경제리뷰] 아편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파이낸셜 리뷰》. 파이낸셜 리뷰.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그리고 몰수한 아편을 폐기처분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 해군 수병이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마카오에서 영국인들을 추방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천비 해전(穿鼻海戰)이 발발했는데 영국은 청나라 군대가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에 영국 내각은 전쟁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20. 권, 홍우 (2021년 1월 6일). “[오늘의 경제소사] 1841년 제2차 전비해전”. 《서울경제》. 서울경제.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1차 천비해전(1839년 11월)에서 영국의 작은 무장상선 2 척이 청 정크선 29척 중 26척을 파괴한 이후 린쩌쉬는 전열을 새로 짰다. 서양제 화포 300문을 도입해 강안 포대에 배치하고 미국제 증기선까지 사들였다. 주강 방어선에 막힌 영국은 과학과 기술에 기댔다. 
  21. 어, 기선 (2022년 4월 21일). “[역사속 경제리뷰] 아편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파이낸셜 리뷰》. 파이낸셜 리뷰.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이런 상황 속에서 천비 해전(穿鼻海戰)이 발발했는데 영국은 청나라 군대가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에 영국 내각은 전쟁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22. 한, 상대 (2014년 6월 12일). “제 1차 아편 전쟁(Opium War 1840~1842)”.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그러나 영국 의회는 명예대신 이익을 취했다. 투표 결과 271대 262표 차로 전쟁이 가결되었다. 이 결과를 보고 글래드스턴은 “영국 양심의 무게가 고작 262표냐”며 한탄했다. 글래드스턴은 후에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수상으로 휙(Whig) 당의 디스레일리와 경쟁적으로 영국을 이끌어 가는 인물이 된다. 
  23. 나, 경수 (2016년 11월 13일). “아편전쟁의 원인, 경과와 의의”. 《경도신문》. 경도신문.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48척의 함선 4,100명의 병사가 탄 영국함대가 북상해서, 북경의 통로인 다구(大沽)·천진(天津)을 위협했다.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대가로 철저한 항전파의 임칙서를 전쟁도발자로서 면직한 다음 굴욕스럽게 강화교섭을 청했다. 그러나 화평을 위한 초안은 쌍방의 불만으로 불발로 그쳐 급기야는 전쟁이 재개됐다. 
  24. 어, 기선 (2022년 4월 21일). “[역사속 경제리뷰] 아편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파이낸셜 리뷰》. 파이낸셜 리뷰.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청국 광둥성 주강 삼각주. 영국 함대가 청군의 정크선과 지상 포대에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제2차 천비(穿鼻) 해전’이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영국은 청의 대형 정크선들을 단박에 깨고 강안에 배치된 11개 포대를 하나하나 무력화시켰다. 전투는 정오께 끝났다. 영국은 38명만 부상당한 반면 청나라는 277명이 죽고 467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로도 100명이나 잡혔다. 혼비백산한 청의 흠차대신 퀴산은 보름 뒤 영국에 홍콩과 광저우 일부를 내주고 배상금도 지불하겠다는 가협약을 맺었다. 도광제를 비롯한 청 조정은 현장의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은(銀)을 하사할 수는 있으나 서양 오랑캐에게 영토를 줄 수 없다’는 청의 입장을 확인한 영국은 병력을 증파하고 전선을 넓혔다. 아편전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1842년 3월 끝난 아편전쟁에서 청은 영국의 모든 요구를 들어줬다. 
  25. 유, 성운 (2019년 1월 6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최고권력자 눈·귀를 가린 죄···청나라 아편전쟁 치욕의 교훈”.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그래서 불법몰수한 아편 배상금 600만냥, 청나라의 핵심 항구 5곳 개항, 홍콩 할양 등을 포함한 영국 측 조건을 대거 수용한 '천비가조약(川鼻假條約)' 체결을 추진했습니다.~~~기선이 겁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선이 영국 측 청구서를 가져오자 도광제는 노발대발했고, 재산(4000만냥)을 몰수한뒤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엄벌에 처했습니다. 
  26. 유, 성운 (2019년 1월 6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최고권력자 눈·귀를 가린 죄···청나라 아편전쟁 치욕의 교훈”.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1841년 3월 15일 광저우 구원투수로 긴급 호출된 참찬대신(參贊大臣) 양방은 청나라를 대표하는 백전노장이었습니다. ~~~ 그는 사흘간 군선 수 십척이 침몰당하고 400여문의 대포를 빼앗기는 것을 목격한 뒤엔 멘탈이 완벽하게 붕괴됐습니다. 그간 믿고 있던 '육도삼략'의 병법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는 "영국의 승리는 사교의 술법자가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며 사교의 법술에 대항한답시고 부녀자의 소변을 모으는가 하면 “서양 오랑캐를 잡으려면 호랑이 날(日)과 시(時)에 태어난 장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묘책'이 통할 리는 없었죠. 급기야 3월 20일에는 영국군의 압박에 밀려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들의 통상을 재개했는데, 이는 '통상을 허락하지 말라'는 도광제의 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 하지만 양방의 거짓 보고에 고무된 도광제는 더 기세가 등등해졌습니다. “그렇게 쉽게 통상을 허가해줄 것 같으면 무엇하러 이런 대병력을 투입했겠냐. 과거 기선 처럼 딴 마음을 품지 말라”고 일축한 황제는 
  27. 유, 성운 (2019년 1월 6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최고권력자 눈·귀를 가린 죄···청나라 아편전쟁 치욕의 교훈”.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황제는 위내대신 겸 어전대신이던 혁산을 정역장군에 임명해 "오랑캐들이 행여나 도망칠 수 있으니 완벽하게 섬멸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물론 혁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전연패 끝에 5월 26일 광저우성에서 백기를 내건 혁산은 “청나라의 모든 군대를 광저우 밖 200리 이상 물러나고 일주일 이내에 600만냥을 바친다”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자비를 털어 영국군이 내건 조건 날짜보다 이틀이나 빨리 납부했습니다. 그리고는 도광제에게는 ‘관군이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영국 기선을 격추해 침몰시키고 함대를 불태웠다’며 600만냥을 바쳐 성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완벽하게 숨겼습니다. 그가 벌인 거짓 보고의 하이라이트는 항복한 지 9일 후 또 다시 올린 6월 4일 상소인데, 쓴웃음을 감추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 앞서 양방의 거짓말은 과장 보고 수준이었다면 혁산의 거짓말은 사실관계를 뒤엎는 사기에 가까웠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28. 유, 성운 (2019년 1월 6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최고권력자 눈·귀를 가린 죄···청나라 아편전쟁 치욕의 교훈”.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1841년 8월 재개된 전투에서 영국군 1만 명은 광둥 지역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했고, 양쯔강으로 북상했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혁산이 이끄는 4만5000명의 군대가 영국군 1000명에게 대패해 3개월 뒤에는 상하이가, 7월에는 청나라 제2의 도시 난징을 지키는 핵심기지인 진강이 함락돼 결국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었습니다. 1년 전 기선이 들고 온 조약서보다 불리한 조건이 담긴 조약이었습니다. 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② 광저우ㆍ상하이 등 5항(港)을 개항한다. ③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④ 전쟁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한다. ⑤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한다. 
  29. 유, 성운 (2019년 1월 6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최고권력자 눈·귀를 가린 죄···청나라 아편전쟁 치욕의 교훈”.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1월 7일에 확인함. 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② 광저우ㆍ상하이 등 5항(港)을 개항한다. ③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④ 전쟁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한다. ⑤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한다. 
  30.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광대한 영토를 가진 청나라는 자급자족 성격이 강하여 생각만큼 영국과 무역이 확대 되지 않았다. 영국의 주력 상품은 면이었는데, 중국에서 생산되는 면포는 질이 더 좋았다. 게다가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광둥(廣東)을 중심으로 대영 항쟁이 전개되었다. 영국의 대 중국 무역은 여전히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아편을 자체 생산을 시작하고 자유무역 덕분에 중국의 차(茶) 수출양은 증가되자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31.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마침 이 때 청나라는 영국인 선주 소유의 중국 선박 애로(Arrow)호를 단속하였다. 선주만 영국인일 뿐 모든 선원은 중국인인데다가 이 배는 분명히 해적 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로서는 정당한 공무집행이었는데 영국은 단속과정에서 명예로운 영국 국기를 바닥에 던져 모독했다는 구실로 전쟁을 선언했다. 핑계 거리가 없어 고민하다가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사후 조사에 국기는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32.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명분 없는 개전사유에 영국 하원마저 전쟁을 부결시켰고 글래드스턴(Gladston)은 정부 불신임안까지 내놨다. 그러나 국익에만 눈이 어두운 영국은 당시 수상이었던 파머스턴(Palmerston)이 하원을 해산하고 투표를 통과시켰다. 
  33.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프랑스도 자기네 선교사가 처형 된 것을 구실로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중국은 졸지에 두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러시아, 미국도 여차하면 참전할 의사를 표명하는 등 청나라는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먹거리가 되고 말았다. 
  34.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이 난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청나라는 영, 불과 조직적인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영불 연합군은 먼저 광저우(廣州)를 침략하여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양쯔강(揚子江)을 거슬러 올라와 분탕질을 계속 하면서 북상을. 했다. 러시아 군도 청나라 영토로 진격해 들어 왔다. 연합군은 텐진을 점령하고1858년 6월 불평등 조약인 텐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아편무역 합법화, 배상금 지불, 개항항구 확대, 베이징에 외국외교관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중국 노동자(苦力) 수출, 장강 통행 및 외국인 중국 내륙 여행 자유 등을 골자로 했다. 
  35.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이래서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조약 체결 후에도 청나라의 후속 조치가 미진하다며 진격을 계속하여 1859년에 수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다.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천진에 설치한 장애물을 철거하고 북상하자 분노한 청군이 대포를 발사하여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을 입히자 영, 프 함대는 후퇴하였다. 
  36.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그들은 본국에서 증원부대를 동원해 돌아 왔다. 1860년 최종공세 때 영국은 지상군 2만 명에 173척의 함대였다. 프랑스는 군인 6천 3백 명에 33척 함대였다. 이들은 베이징으로 진격하면서 발해만의 주요 항구는 모조리 초토화 시키고 상륙해서 문제의 대고포대로 쳐들어가서 전에 당한 복수를 철저히 하였다. 이들은 톈진에 상륙하여 수비군을 격파하고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겁에 질린 황제 함풍제와 주전파들은 열하로 피신하였다. 
  37. 신, 명호 (2016년 12월 17일). “[새 연재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1)] 서른 살 공친왕, 淸 실권을 장악하다”. 《월간중앙》. 중앙일보사.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1860년의 북경 함락 때 청나라군은 몽고 출신의 49세 장군 승격림심(僧格林沈)이 지휘했다. 그는 몽고와 만주에서 차출된 7000기마대를 거느리고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떠올랐다. 당시 승격림심의 기마대는 청나라 최강이자 동북아 최강이었다. 함풍제는 이런 승격림심이라면 영국과 프랑스 침략군을 충분히 격퇴할 것으로 믿고 북경 방어를 맡겼다.~~~면 영국과 프랑스 병력은 각각 4000명으로 합 8000명이었다. 수로 치면 청나라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이었지만, 이들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근대 보병이었다. 이런 면에서 팔리교에서 청나라 군대와 영국·프랑스 군대가 결전을 벌인 것은 전통시대 최강의 군대와 근대 최강의 군대가 마주친 전투라 할 수 있다. 승격림심은 기마대의 장점을 살려 집단 돌격으로 승패를 결정지으려 했다. 과거라면 이런 작전이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무기로 무장한 군대에는 통하지 않았다. 대포와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한 영국과 프랑스군의 집단 사격에 기마대는 추풍낙엽처럼 죽어나갔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1만 2000명의 기마대 중 1만여 명이 전사하고 겨우 2000여 명만 살아남았다. 1만 보병 중에서도 2000여 명이 전사함으로써 청나라의 병력 손실은 1만2000명에 달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중앙 군사력은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반면 영국군 2명, 프랑스군 3명 등 연합군은 총 5명만 전사했다. 팔리교 전투는 말이 전쟁이지 일방적인 살육이었던 것이다. 이 충격으로 함풍제는 8월 8일 북경을 버리고 열하로 몽진했고, 그 뒤를 이어 8월 20일 영국과 프랑스군이 북경을 무혈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북경은 영국과 프랑스군에 유린됐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던 황실 별장 원명원(圓明園)은 약탈당했고, 청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38. 한, 상대 (2014년 6월 26일). “제2차 아편 전쟁”. 《한호일보》. 한호일보. 2024년 1월 8일에 확인함. 겁에 질린 황제 함풍제와 주전파들은 열하로 피신하였다. 팔기군을 완파한 연합군은 결국 베이징을 함락 시켰다. 그들은 대천황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원명원은 동양 최고의 정원이자 전세계에서 청 황제에게 진상 된 각종 보물의 창고였다. 연합군은 이 곳을 약탈한 후 건물들은 불태워 버렸다. 도망간 황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여기에서 털린 보물, 유물들이 요즘도 가끔 경매장에 나오고 있다. 필자도 20 여 년 전 원명원에 가서 향로의 금 도금(淘金)까지 벗겨 간 것을 보았다. 베이징을 함락 당하고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결국 베이징 조약(北京條約)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굴욕적인 조약엔 천진조약에 추가로 개항 도시를 늘이고 배상금도 늘고 홍콩 옆 구룡(九龍) 반도까지 할양했다. 여기에 통상, 포교의 자유는 물론, 양자강에 군함 항해까지 양보해야만 했다. 러시아에게는 이 조약을 중재해 준 대가로 한반도 면적의 4분의 3쯤 되는 연해주를 내 주었다. ~~~ 한편 1864년 본격화된 청나라와 서구열강의 협공으로 질 것을 예감한 천왕 홍수전은 자살하고 7월 천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