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소바스 조약

알카소바스 조약(Treaty of Alcáçovas)은 1479년 9월 4일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카스티야 왕위계승전(1495~1497)을 종결시키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이사벨 1세(1451~1504)를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며 포르투갈이 대서양 상에 몇몇 섬들에 대한 소유권과 아프리카 해안 지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스페인 측 참석자는 페르난도 2세(아라곤), 이사벨 1세(카스티야)이고 포르투갈에서는 국왕 아폰수 5세(1432-1481)와 그의 아들 주앙 왕자가 참석하였다.

알카소바스 조약 1479년 9월 4일

카스티야 왕위계승전편집

1474년 12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사망 후,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와 엔리케 4의 딸 후아나(1462~1530) 사이에서 왕위계승 다툼이 벌어졌다. 분쟁의 원인은 후아나가 선왕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게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엔리케 4세는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불가능하였기에[1] 당사자의 주장과는 달리 진짜 후아나의 생부는 초대 알부케르크 공작 벨트랑(1443~1492)이라고 알려져 있었다.[2]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한후 후아나의 권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475년 5월, 카스티야를 침공하였다.[3]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6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후 섭정과 대귀족들에게 휘둘리며 다소 무능한 군주로 성장했다. 약한 국내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실시했는데 예상외로 선전을 하였다.[4] 자신감이 생긴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의 왕권을 노리며 전쟁을 벌였으나 1476년 3월 토로전투에서 패하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5][6][7] 육상에서의 전투와 병행하여 대서양에서도 해상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아프리카 기니에 대한 교역권과 대서양 항해와 탐사에 대해 양국간에 주장이 충돌한 결과였다. 지상에서와는 달리 대서양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하였다.[8][9] 전쟁은 3년 더 질질 끌었는데[10] 육지에서는 카스티야가 우세하였고, 바다에서는 포르투갈이 우세하였다.[11] 지리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양국은 알카소바스에서 만나 협상을 시작 하였는데, 포르투갈은 카스티야와 분쟁 중인 대서양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를 포기하게 되었다.

조약결과편집

  • 아폰수 5세와 후아나의 결혼은 무효화 되었고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 후아나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포르투갈의 수도회에 입회했다.
  • 후아나와 아폰수 5세를 지지한 자들은 사면되었다.[12]
  •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지배권은 카스티야가 소유했다.[13][14]
  •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하고 양국간에 분쟁 중인 모든 영토와 아프리카 해안에 대해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주요지역은 기니의 금광산, 마데이라, 아조레스, 케이프 베르데였다. 포르투갈은 페즈 왕국 독점 정복권도 따냈다.[15][16]
  • 포르투갈은 카나리아 제도 남쪽의 모든 대서양에서 항해, 정복, 지배, 무역의 독점권을 획득했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대서양에서 알려진 영토뿐만 아니라 미래에 발견될 영토에 대한 소유권도 획득했다.(이로 인해 1494년에 양국간에 영토분쟁이 발생함)
  • 아폰수(아폰수 5세의 손자)와 이사벨(페르난도 2세의 딸)은 함께 모우라 마을에서 결혼적령기가 될때까지 거주한다. 이에 따라 발생한 비용은 스페인에서 책임진다.(모우라 약정,Tercerias de Morua)
  • 포르투갈은 전쟁 보상금을 이사벨의 지참금 형태로 10만6676 도블레를 받기로 했다.[17]

결과와 영향편집

 
콜럼버스의 항해경로
 
보라색 점선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1493년에 지정한 경계선이고, 보라색 실선이 1494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맺어진 선이다.

1481년 교황청으로 부터 이 조약에 대해 비준을 받았다. 이사벨 1세는 왕권을 보장받았으나 카나리아 제도 남쪽 대서양, 북위 26도 이남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적 항해권과 상업권을 인정하는것으로 이는 사실상 스페인이 대서양 밖으로 봉쇄되었음을 의미한다. 스페인 학자인 안토니오 루메우 데 아르마스는 1479년 알카소바스의 평화협정으로 가톨릭 군주들이 평화를 지나치게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고 평가하였다.[18] 그리고 역사학자 몬세라트 레온 게레로는 "...그들은 대서양에 의해서 영토와 세력확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19]

이 조약으로 인해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허락없이 포르투갈 소유지로 항해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이는 추후 양국간의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1493년 3월,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지원받은 콜럼버스가 항해를 통해 몇몇 개의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고 귀국했는데, 그 섬들이 북위 26도 이남에 위치해 있음으로 인해 양국간에 체결한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영토에 속했기 때문이었다.[20]

양국은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청에 분쟁조정을 요청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3일 칙령을 통해 중재안을 발표했으나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는 교황의 중재안이 포르투갈에게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불복하였다.[21] 양국은 로마 교황청과 무관하게 단독으로[22] 약 1년여의 협상 과정을 거쳐 1494년에 새로운 영토 경계선을 규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23]

알카소바 조약은 식민주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유럽 강대국들이 나머지 세계를 '영향력의 영역'으로 나누고 그러한 영역 내에 위치한 영토를 식민지화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모두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을 공식적으로 개괄하는 최초의 국제 문서 중 하나이다. 이것은 20세기 탈식민지화까지 유럽 열강의 이념과 실천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으로 남아 있었다. 알카소바스 조약은 동일한 기본원칙에 근거한 많은 후기 국제조약과 기구들의 선례로 간주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세계 탐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입장을 더욱 성문화한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4세기 후 베를린의 1884년 총회의 결의가 포함되는데, 이 결의안은 아프리카를 식민지 세력권으로 나눈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송동훈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30페이지
  2. 송동훈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33페이지
  3. European Treaties Bearing o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nd Its Dependencies to 1648, p.33, Washington, D.C., Frances Gardiner Davenport, 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1917–37 – Google Books. Reprint edition, 4 vols., (October 2004), Lawbook Exchange, ISBN 1-58477-422-3
  4. 송동훈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44페이지
  5. 송동훈 <대항해시대의 탄생> 시공사, 145페이지
  6. British historian Ian Robertson: “Civil war, however, was immediately provoked by the partisans of "la Beltraneja", whose claim was supported by the king of Portugal, but after the indecisive battle of Toro (1476) the Portuguese withdrew leaving Fernando and Isabel firmly established” in Spain, the mainland, E. Benn, 1975, p.18.
  7. Historian Carl hanson: “In March 1476, the Portuguese and Castilian armies met at Toro. Thanks largely to [Prince] João`s battlefield skills, the Portuguese managed to fight Fernando`s forces to a near draw. But the battle nonetheless effectively ended Afonso`s chances of ruling Castile. His Castilian partisans threw their support to Fernando and Isabella, rather than stick with a lost cause.” in Atlantic emporium: Portugal and the wider world, 1147–1497, volume 47 de Iberian studies, University press of the South, 2002, p.128.
  8. Historian Malyn Newitt: "However, in 1478 the Portuguese surprised thirty-five Castilian ships returning from Mina [Guinea] and seized them and all their gold. Another...Castilian voyage to Mina, that of Eustache de la Fosse, was intercepted ... in 1480. (...) All things considered,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Portuguese emerged victorious from this first maritime colonial war. They were far better organised than the Castilians, were able to raise money for the preparation and supply of their fleets, and had clear central direction from ... [Prince] John." In A history of Portuguese overseas expansion, 1400–1668, Routledge, New York, 2005, pp. 39–40
  9. Battle of Guinea: ↓ Alonso de Palencia, Década IV, Book XXXIII, Chapter V ("Disaster among those sent to the mines of gold [Guinea]. Charges against the King..."), pp. 91–94. This was a decisive battle because after it, in spite of the Catholic Monarchs' attempts, they were unable to send new fleets to Guinea, Canary or to any part of the Portuguese empire until the end of the war. The Perfect Prince sent an order to drown any Castilian crew captured in Guinea waters. Even the Castilian navies which left Guinea before the signature of the peace treaty had to pay the tax ("quinto") to the Portuguese crown when they returned to Castile after the peace treaty. Isabella had to ask permission of Afonso V so that this tax could be paid in Castilian harbours. Naturally all this caused a grudge against the Catholic Monarchs in Andalusia.
  10. Plunkett,Ierne. Isabel of Castile The Knickerbocker Press, 1915, p. 109–110
  11. Bailey W. Diffie and George D. Winius "In a war in which the Castilians were victorious on land and the Portuguese at sea, ..." in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volume 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 p. 152.
  12. Edwards,John. The Spain of the Catholic Monarchs 1474–1520. Blackwell Publishers Inc, 2000, p. 38
  13. Alonso de Palencia, Decada IV, Book XXXI, Chapters VIII and IX ("preparation of 2 fleets [to Guinea and to Canary, respectively] so that with them King Ferdinand crush its enemies [the Portuguese]...").
  14. Alonso de Palencia, Decada IV, book XXXII, chapter III: in 1478 a Portuguese fleet intercepted the armada of 25 navies sent by Ferdinand to conquer Gran Canary – capturing 5 of its navies plus 200 Castilians – and forced it to fled hastily and definitively from Canary waters. This victory allowed Prince John to use the Canary Islands as an "exchange coin" in the peace treaty of Alcáçovas.
  15. Pina, Chronica de El-Rei D. Affonso V, 3rd book, chapter CXCIV (Editorial error: Chapter CXCIV erroneously appears as Chapter CLXIV.Reports the end of the siege of Ceuta by the arrival of the fleet with Afonso V).
  16. Quesada, Portugueses en la frontera de Granada, 2000, p. 98. In 1476 Ceuta was simultaneously besieged by the moors and a Castilian army led by the Duke of Medina Sidónia. The Castilians conquered the city from the Portuguese who took refuge in the inner fortress, but a Portuguese fleet arrived "in extremis" and regained the city. A Ceuta dominated by the Castilians would certainly have forced the right to conquer Fez (Morocco) to be shared between Portugal and Castile instead of the monopoly the Portuguese acquired.
  17. Mendonça, 2007, p. 102,103.
  18. António Rumeu de Armas- book description, MAPFRE, Madrid, 1992, page 88.
  19. Monserrat León Guerrero in El segundo viaje colombino, University of Valladolid, 2000, chapter 2, pp. 49–50.
  20. 함규진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 창
  21. 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페이지
  22. 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264페이지
  23. 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10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