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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관아지(楊洲官衙址)는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지이다. 1999년 4월 23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양주관아지
(楊洲官衙址)
대한민국 경기도기념물
종목기념물 제167호
(1999년 4월 23일 지정)
수량1동
시대조선시대
위치
양주관아지 (대한민국)
양주관아지
주소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141-1
좌표북위 37° 47′ 7″ 동경 127° 1′ 46″ / 북위 37.78528° 동경 127.02944°  / 37.78528; 127.02944좌표: 북위 37° 47′ 7″ 동경 127° 1′ 46″ / 북위 37.78528° 동경 127.02944°  / 37.78528; 127.02944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양주동헌
대한민국 양주시향토유적(해지)
종목향토유적 제15호
(1986년 4월 15일 지정)
(1999년 4월 23일 해지)

개요편집

양주구읍< 楊州舊邑 >은 의정부시에서 동두천시에 이르는 3번 국도에서 주내< 州內 >로 통하는 350번 지방도를 따라 동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구읍은 북쪽으로 해발 520m의 불국산< 佛國山 >(일명 불곡산< 佛谷山 >)을 등지고 있으며 동쪽으로 고도 100m 내외의 구릉이 감싸고 서쪽에는 해발 213m의 파산< 坡山 >, 남쪽에는 해발 285m의 호명산이 사방을 둘러싼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앞쪽으로 서원천의 지류가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 背山臨水 >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고구려의 남평양성< 南平壤城 >이었는데 백제가 이를 취하여 370년(근초고왕 25)에 남한산< 南漢山 >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었고 474년(개로왕 20)에 고구려 장수왕이 다시 취하여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552년(진흥왕 13)에 신라가 이곳을 획득하여 556년(동왕 17)에 북한산주< 北漢山州 >라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4)에 한양군< 漢陽郡 >으로 개칭하였다.

940년(태조 23)에는 승격하여 견주< 見州 >라 하였으며 983년(성종 2)에는 12목< 牧 >의 하나로 목사< 牧使 >를 두었고 995년(성종 14)에 12주< 州 >의 절도사< 節度使 >를 두었는데 양주좌신책군< 楊州左神策軍 >이라 하여 해주< 海州 >의 우신책군절도사< 右神策軍節度使 >와 함께 2보< 補 >로 삼았다. 1012년(현종 3)에 2보< 補 >와 12절도사< 節度使 >를 폐하여 안무사< 按撫使 >라 개칭하였으며 1018년(동왕 9)에는 지양주사< 知楊州事 >로 낮추었다. 1104년(숙종 9)에 남경유수관< 南京留守官 >으로 하였고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 漢陽府 >로 고쳤다.

1395년(태조 4)에 한양부< 漢陽府 >를 한성부< 漢城府 >로 고치면서 치소< 治所 >를 견주< 見州 >(현 주내면 고읍리)로 옮겨 양주군< 楊州郡 >이라 하였고 1397년(동왕 6)에 다시 부< 府 >로 승격하여 부사< 府使 >를 두었으며 1400년(태종 1)에는 지양주사< 知楊州事 >로 낮추었다. 1410년(태종 10)에 양주목< 楊州牧 >으로 승격하고 1413년(동왕 13)에 도호부< 都護府 >로 다시 바꾸었으며 견주< 見州 >와 사천< 沙川 >, 풍양< 豊壤 >의 3현< 縣 >을 속하게 하였다. 1430년(세종 12)에 다시 목< 牧 >으로 하였고 관내에 파주< 坡州 >, 고양< 高陽 >의 2군< 郡 >과 영평< 永平 >, 포천< 抱川 >, 적성< 積城 >, 교하< 交河 >, 가평< 加平 >의 5현< 縣 >을 두었다. 1504년(연산군 5)에 왕이 유행< 遊幸 >하는 장소로 백성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양주목< 楊州牧 >을 없애고 일부는 이웃 고을에 속하게 하였다가 1511년(중종 6)에 다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혁시 한성부< 漢城府 >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양주군< 楊州郡 >이 되었고 1922년에는 군< 郡 >의 치소< 治所 >를 시둔면< 柴芚面 >(현 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옮겼다. 이후 한국전쟁< 韓國戰爭 >으로 관아< 官衙 >가 파괴되어 복구하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