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조

중국 당나라 군벌, 무태군 절도사(武泰軍節度使)

왕건조(王建肇, 생몰년 미상)는 당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군벌로, 887년부터 888년까지 형남 번진(荊南藩鎭, 현 호북성 형주시)을 다스렸다. 이후 무태군 절도사(武泰軍節度使, 무태군은 현 중경시)가 되고, 888년부터 896년 왕건에 투항할 때까지 무태군 번진을 경영하였다.

왕건조
王建肇
당나라의 무태군 절도사

신상정보
출생일 불명
출생지 당나라
사망일 불명
사망지 불명
직업 당나라 군벌, 무태군 절도사(武泰軍節度使)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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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남 번진을 지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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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조의 출신 배경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어떠한 정사에도 그의 사적을 다룬 열전(列傳)이 없었을 정도이다. 그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인 기록은 887년에 있었다. 887년 당시, 그는 진종권의 휘하에서 산남동도(山南東道, 본거지는 현 후베이성 샹양 시) 유후(留後)를 자칭했던 조덕인의 부장으로 있었다. 진종권은 전직 당나라 장군이자 이전에 봉국군 절도사(奉國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허난성 주마뎬 시)로 있었으나, 당 희종의 치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그의 본거지인 채주(蔡州, 현 허난성 주마뎬 시)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었다.[1]

887년 12월 25일, 조덕인은 당나라의 형남 번진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 장괴를 살해하였다. 이후 그는 왕건조에게 형남의 수비를 맡기고 떠났는데, 그 수도인 강릉현(江陵縣, 현 후베이성 장링 현)에는 전란 이후 수백 가구만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888년, 당나라의 귀주자사(歸州刺史, 현 후베이성 쯔구이 현) 곽우가 형남을 공격하여 왕건조를 축출하였다. 이에 왕건조는 검주(黔州, 현 충칭 시 펑수이 현)로 달아나 버렸다.[1] 표면상으로는 그로부터 얼마 후인 890년경에 들어서 왕건조는 당나라 정부에 투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조정으로부터 무태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1][2]

무태군 절도사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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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조에 의한 무태군 번진의 지배 및 그 치세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96년, 곽우(이때 그는 그의 이름을 본명인 성예로 회복하였다. 성예는 그가 살인 사건으로 인해 망명하고 있었던 동안 그의 성명을 곽우로 바꾸었던 것이다)는 그의 부하 장수 허존(許存)과 함께 장강 서쪽으로 진격하여 왕건조의 영지에 속해 있던 그 일대 연안의 주현(州縣)들을 모두 함락시켜 버렸다. 왕건조는 그들의 공격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검주를 버리고 패잔병을 수습하여 풍도(豐都, 현 쓰촨성 펑두 현)로 철수하였다.[3]

성예는 그의 부하 장수 조무(趙武)를 무태군 유후에 임명하였다. 그 후, 조무는 여러 차례에 걸쳐 풍도에서 왕건조를 공격하였다. 결국 조무의 공격을 격퇴할 수가 없었던 왕건조는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본거지는 현 쓰촨성 청두시) 왕건에게로 투항해 버렸다. 그것이 왕건조에 관한 최후의 역사적 기록이었으며, 이후 그가 왕건 휘하에 있으면서 어떠한 전쟁에 참가했는지 아니면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3]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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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치통감》, 제257권
  2. 중국의 현대 역사가인 보양(柏楊)에 의하면, 해당 번진은 890년에 무태군(武泰軍)의 군호(軍號)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왕건조가 당나라에 투항한 가장 적절한 시점으로 날짜를 기입하고 있다. 《보양판 자치통감(柏楊版資治通鑑)》 제62권(888년도)을 참조. (단, 《보양판 자치통감》은 국내에서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또, 《신당서제69권의 방진표(方鎭表) 제6장에도 890년에 검주관찰사(黔州觀察使)를 절도사(節度使)로 승격시키고 무태군의 군호를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자치통감》, 제260권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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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신설(검주관찰사에서 승격)
무태군 절도사
890년 ~ 898년
후임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