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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충(王充, 27년 ~ ?)은 중국 후한 초기의 사상가로, 중임(仲任)이며 회계군 상우현(上虞縣) 사람이다.

목차

생애편집

신분이 낮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청년시대 낙양(洛陽)으로 나와 반표(班彪, 반고의 아버지)에게 배웠는데 가난하여 책을 사지 못하고 가두의 서점에서 읽고 기억하여 백가(百家)의 사상에 통했다고 한다. 이어 현(縣), 군도위(郡都尉), 군 등의 지방 관청에 근무하였고, 공조(功曹)를 역임하며, 훌륭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권력자와 때때로 생각이 맞지 않아 사직하여 향리의 자제를 가르쳤다. 60세 때 자사(刺史) 동근(董勤)에게 초빙되어 주종사(州從事)가 되었고, 이어 치중(治中)이 되었으나 62세로 퇴관하여 죽을 때까지 저술에 전념하였다.

사상편집

주저 《논형》 속에 일관된 지식 일반에 대한 비판주의와 실증적 태도는 천(天)의 의지에 의하여 자연과 사회가 지배된다고 하는 천인감응의 정통사상을 부인하였다. 이 경험적 인식과 거기에 따른 논리적 추론만을 승인하고, 모든 초경험적인 설화(說話)나 역사의 허위를 폭로하려고 한 것은 신비적 해석학으로 화한 어용철학(御用哲學=공양학, 금문학)이나 그것을 옹호한 속류 제관념(俗流諸觀念=참위설)에 이론적인 큰 타격을 주었다. 그가 이와 같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사상을 갖게 된 근거로는 당시의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과학, 민간의 실증주의적인 해석학, 도가의 주관을 배제하는 자연철학 등이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그가 유능한 자질을 소지하고 있으면서 불우한 하급관리의 생애로 시종함으로써 그는 중세 봉건적인 사회기구가 정비됨에 따라 계급관계가 고정되어 사회적 현실과 과학적 진리와의 부조화를 수긍하기 어려웠던 점도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부조(父祖)로부터 받아 이은 의협적인 비타협의 성격도 이러한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준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나 봉건체제의 진행 앞에 그의 현실적 역할은 무력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고고한 비판의식은 현 왕조를 불합리하게 옹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하게 찬미하려고 하는 한편 미래에의 적극적인 활동의지가 부족했다. 따라서 그 자신은 깊은 숙명론에 사로잡힌 채 생애를 끝마쳤으나 중국 중세를 통하여 혁신적 철학의 수립을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저서편집

전기 자료편집

  • 『후한서』 권49, 「열전」39, 왕충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