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倭館 全面 絨緞爆擊作戰)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실시된 최대의 융단폭격으로, 1950년 8월 16일 UN군 사령관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의 명령으로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km 지역에 B-29폭격기를 이용하여 960톤의 폭탄을 투여했다.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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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의 일부 | |||||||
1950년 8월 16일 융단폭격을 가한 왜관지구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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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미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병력 | |||||||
B-29 폭격기 98대 |
군사 3개 사단 40,000여명 105 전차사단 | ||||||
피해 규모 | |||||||
없음. | 정확히 확인 불가 |
상황
편집다부동 지역에 투입된 조선인민군은 제2군단 예하 제 1, 13, 15의 3개 사단과 제 105전차사단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인민군의 목표는 8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이전 낙동강을 신속히 도하하는 것이었다. 이에 주된 공격을 다부동 축선에 투입하여 8월 공세의 목표인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려 하였다. 이에 조선인민군은 전 전선에서 가용한 모든 접근로에 동시 공격을 개시하여 한.미 연합군의 전투력을 조기에 분산시키고, 어느 축선에서든지 돌파구가 형성되면 이를 확대하여 후방 깊숙이 진출해 차기 작전의 발판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성리까지 국군 제 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 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 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다. 특히, 국군 제 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8월 3일부터 왜관-낙동리 일대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는 조선인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며 진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배경
편집지연전을 통해 전투력이 약화된 조선인민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일대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다짐하자 전쟁의 목표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민군의 수정된 목표는 8월 15일까지 대구[1]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의 대구방향에는 조선인민군 주공부대가 집중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인민군 제 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8월 5일부터 낙동강을 도하한 후 국군 제 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공격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국군 제 1사단은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고, 공방전을 지속하던 중 8월 12일에는 육군본부의 전선 축소 및 조정으로 다부동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 1사단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부 조선인민군이 328고지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대구 방면으로 조선인민군의 공세가 한창인 8월 14일에는 왜관 북방에 조선인민군 3개 사단과 기갑부대가 집결하여 도하를 준비 중에 있다는 정보가 미 제 8군 사령부에 접수되었다.
전투
편집조선인민군군 집결 정보 접수
편집미 제8군 사령부 정보처에서는 왜관 북서쪽 부근에 적 3개 사단과 제 105전차사단이 집결하고 있으며 그 병력은 약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또 국군 제 1사단 제 12연대 정보과에서도 수색대의 보고를 통해 연대 정면에 2개 사단이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이러한 적정 상황을 사단장에게 보고하였고,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정찰을 실시한 뒤 적정을 육군본부에 보고하였다.
융단폭격 건의 및 실시
편집미 제 1기병사단과 국군 제 1사단으로부터 적정을 보고받은 미 제 8군은 전 전선에서의 조선인민군 공세로 인해 왜관 정면의 적에 대한 별다른 대비책이 없었다. 이에 미 제 8군 작전처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Normandy) 상륙작전시 생로(Saint Lo) 지역에 감행한 융단폭격을 생각하고, 이를 유엔군사령부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건의하였다.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미 극동공군사령관에게 적의 집결지를 폭격하라고 지시하였고, 미 폭격사령관과 협의 후에 8월 16일 융단폭격이 계획되었다.
융단폭격에 투입가능한 전력은 B-29중폭격기 2개 전대와 다른 3개 전대에서 차출한 6개 대대였다. 미 공군 폭격사령관 오도넬(Emmett R.O'Donnell) 소장은 이들 12개 대대 전력으로 27평방마일에 달하는 표적지역을 완전히 초토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 전선 상황을 고려할 때 융단폭격은 적에게 심리적 효과에 불과할지라도 그런대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폭격사령부 작전계획장교들은 27평방마일의 표적을 12개의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별로 폭격조준점을 설정하여 각 대대에 한 구역씩 배당하였다. 모든 폭격기 승무원은 낙동강 동안에 배치된 유엔지상군에게 오폭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받았다.
유엔군 사령부는 아군 지상부대에 피해를 우려하여 왜관 서북지역에 폭격을 한 후 그 성과를 고려하여 낙동강 동쪽 지역에 8월 19일 2차 폭격을 계획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조선인민군의 도하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왜관 동북부 지역(강 동안)을 폭격해 주도록 몇 번이나 건의했으나 극동공군은 오폭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2] 이에 게이 사단장은 연막으로 표시를 하던가, 경비행기로 유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거듭 제의해 보았지만 공군측은 서안에 대한 폭격결과를 보고 결정하자며 거절했다.
그 결과 첫 번째 융단폭격은 8월 16일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에 걸쳐 실시되어 B-29 폭격기 98대가 투입되었다. B-29폭격기 98대는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줄격하여 5.6km x 12km 지역에 400~900kg 폭탄 960톤[3]을 투하하였다. 이 폭격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공군력을 투입한 것이다.
융단폭격 이후
편집융단폭격이 끝난 이후 폭격사령관 오도넬(Emmett R.O'Donnell)소장은 폭격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2시간 이상 목표지역 상공을 선회하였으나 폭격 뒤에 일어난 짙은 연기로 정확한 전과를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8월 16일 저녁 제 15연대 제 1대대 정보장교[4]는 연대로부터 대안의 적정과 폭격성과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5명으로 편성된 수색조를 이끌고 낙동강을 건너 융단폭격 지역 100m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적 1개 소대와 조우한 수색조는 적과 총격전을 벌인후 복귀하였다. 미 제 1기병사단에서도 융단폭격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전투정찰대를 침투시켰으나 적의 매복조에 걸려 폭격지역에 접근하지 못했다.
전투에 대한 표현
편집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에서 왜관 전면 융단폭격 작전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미 8군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경에 대규모 공숩이 있을 예정이니 전 병력으로 하여금 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라"는 내용이였다. 정확하게 미 공군이 어느 곳을 폭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지시에 따라 당일의 그 시간에 맞춰 전 병력에게 진지에서 나오지 말도록 명령했다.
하늘에서는 그저 "웅~ 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미 8군이 폭격에 대비해 참호 속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고 했던 시간이었다. 하늘에는 그저 굉음만이 들렸다. 미군 폭격기들이 대구 북방, 왜관 쪽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가고 있었다.
이어 예정한 시간에 이르자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맹렬한 폭격이었다. 이번에는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폭발음과 함께 땅이 울렁거렸다.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지정한 지역을 융단 깔듯이 폭탄으로 덮어버리는 작전이었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네다 기지에서 출발한 미군 B-29 전략 폭격기 98대가 넘어왔던 것이다.
이들 폭격기들은 이날 오전 11시 58분에 폭격을 시작해 12시 24분까지 26분에 걸쳐 400~900kg에 달하는 폭탄 960t을 쏟아 부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다. 미군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폭격이었다. 그만큼 다부동에서 벌어지던 당시의 전쟁 양상이 심각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날의 폭격은 왜관 북방인 구미 일대의 가로 5.6km, 세로 12km 지역에 집중했다. 우리로서는 적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서 폭격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폭격의 규모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했으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중에 드러난 결과는 이랬다. 낙동강 일대에서 대구를 지향하던 북한군 주요 병력은 사실 대부분 이미 강을 넘어 우리와 접전 중이었다. 미군 폭격기가 폭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운 지역이었다. 이곳의 북한군을 폭격하면 그들과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아군의 피해가 막심해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북한군 병력을 향한 폭격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전선에 있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 물자의 보급 기지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나중에 포로로 잡혔던 북한군의 증언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왜관 인근 약목 일대 북한군 3사단과 15사단 예비대는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고 한다. 지원 포병과 공병, 전차와 탄약, 보급품 등이 미군의 융단폭격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애기다. 북한군 내부를 잇는 통신선 등도 모두 폭격으로 끊겼다고 한다. 북한군은 이를 '비밀'로 분류해 대외적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설명이다.
결과 및 영향
편집조선인민군의 증언
편집"B-29의 융단폭격으로 조선인민군의 손실은 매우 컸다. 낙동강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제 3사단 및 제 15사단의 예비대, 지원포병, 그리고 전차와 탄약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이 파괴되고 유선이 모두 절단되어 대혼란이 빚어졌다.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김무정을 비롯한 군단 간부들은 이때부터 동요되어 승리에 대한 확신도 사라졌으며, 이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조선인민군 제 2군단에서는 B-29기 120대가 출격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피해에 대해서는 일체 말도 못하게하여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 라고 증언하였다. 김윤문 소좌의 증언을 종합해 볼때, 조선인민군은 융단폭격에 의해 물심양면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인민군 제 3사단 포병연대장 임헌일씨의 증언
편집"공산군 전선은 물론 후방까지 모조리 마비됐고, 은폐했던 장비, 차량, 탱크, 포열, 각종 보급품이 파괴되었으며, 전선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또 장비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이 폭격으로 공산군 사기는 아주 땅에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융단폭격이 조선인민군에 미친 영향
편집후일 포로 진술에 따르면 이때는 이미 조선인민군의 도하는 완료되었고, 강서안에 소수의 후방부대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출판물에서는 융단폭격에 대하여 "닭 두마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댄 것과 다를바 없다."라고 비꼬았다. 16일 폭격권 지역에 집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적은 제 3사단[6]. 제 105기갑사단[7]과 적 제 15사단 및 제 2사단의 포병연대다. 이들 부대의 병력을 모두 합쳐서 2만명 수준이다. 적 15사단은 이때 낙동강을 건너서 유학산과 숲데미산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강 서안에 남아있는 병력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적 제 3사단도 강 동안의 328고지와 154고지에서 공방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주력이 강을 건너온 상태이다. 강 서안에는 전차 일부와 포병 및 일부병력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결국, 낙동강 서안에 있는 적 병력은 최대 1만명 수준으로 미 제1기병사단장인 게이소장의 말을 들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컸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출판물이 "닭 두마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댄 것과 다를바 없다."라고 표현한 것과는 다르게 일선의 지휘관들은 "전선을 물론 후방까지 마비되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융단폭격이 한미연합군에 미친 영향
편집융단폭격이 실질적으로 결과물을 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미연합군에게는 사기가 하늘로 치솟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미 제 8군의 한 상사는 8월 30일 폭격사령관 오도넬 소장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 미 보병은 귀하가 왜관 지역을 폭격하여 준 데 대하여 워커 장군과 같이 모자를 벗고 정중히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 제1기병사단이 왜관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8월 16일 새벽 적은 전차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우리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적의 공격을 받고 당황하고 있을 때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던 폭격기가 적진에 무수한 폭탄을 투하하자 우리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위기는 완전히 해소되고 적은 소탕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지상군에게 극도의 사기를 앙양시켜 준 것이며 완전한 공지 협동작전인 것입니다."
융단폭격 당시 328고지를 방어하던 15연대 1소대장인 유영남 소위는 당시의 모습을 "가을철 잠자리 떼가 뜬 것처럼 B-29폭격기가 새카맣게 떠 알을 낳듯이 폭탄을 흘려댔다. 지상에서 올라오는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먼지, 그리고 그때마다 낙동강 물이 출렁출렁 움직이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통쾌하다. 당시 우리는 기분이 좋아 '만세!'를 불렀다."고 증언했다.
융단폭격의 결과
편집국군과 미국군은 융단폭격을 통해 유엔군 방어지역에 대한 조선인민군 포격 감소, 조선인민군의 심리적 공황 발생, 조선인민군의 병력분산 효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실제로 확인된 전과가 폭격 후 일시적으로 조선인민군의 포격이 약화된 것 뿐이었고, 대구 정면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압력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2차로 계획되어 있던 19일의 융단폭격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에는 다부동 동쪽 가산으로 침투하려던 조선인민군이 계획을 변경하여 유학산 부근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국군 제 1사단은 "다부동이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상황을 주시하던 미 제8군 사령부는 국군 제 1사단만으로는 다부동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8월 17일 미 제 25사단 제 27연대를 다부동지역에 투입하였다. 또한 미 제 2사단 제 23연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육군본부도 국군 제 8사단 제 10연대를 제 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지역에 투입하여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 침투한 조선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날의 충격으로 대구의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였고, 시민들에게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 일대는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가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관련 추모비
편집영령들이여!
우리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기억하노라,
이곳 유학산 봉우리에 그리고 낙동강 기슭에 남긴
그 때 그 날의 거룩한 희생을 고귀한 피의 발자국을
우리 겨례는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The spirits of the departed!We saw and we heard and we will remember
And we will keep dear in our hearts forever
The sacred sacrifice of that day and
the bloody footsteps Left on the peak of MT
YUHAG and on the bank of
the NAG-DONG river
- 왜관지구 전적비 비문
참고 문헌
편집- 《1129일간의 전쟁 6.25 : 1950.6.25 ~ 1953.7.27》, 하보철, 육군군사연구소, 2014
- 《6.25전쟁 1129일 : 1950.6.25-1953.7.27 : 요약본》, 이중근, 우정문고, 2014
- 《6.25전쟁 주요전투2》, 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 《多富洞戰鬪》, 한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1
- 《낙동강: 6.25전쟁사, 제6권:, 구국의 전장 다부동 세기의 도박 인천상륙작전》, 유형석, 플래닛미디어, 2010
- 《6.25 전쟁사 제 5권(낙동강선 방어작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 《55일》, 칠곡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2013
- 《백선엽의 6.25번쟁 징비록. 제2권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백선엽, 책발,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