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는 동학 농민 운동 때 일어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농민군 해산과 진압의 원인이 되었다.

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 운동의 일부
날짜1894년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 ~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장소
결과
교전국

동학 농민군

  • 북접
  • 남접
조선 조선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전봉준
손병희
신정희
허진
이두황
이규태
이기동
조병완
일본 제국 미나미 고시로
일본 제국 모리오 마사이치
병력
농민군 남접 1만여 명
북접 1만여 명
총병력 2만여 명
조선군 3,200여명
일본 제국 일본군 200여명
총병력 3,400여명

배경 편집

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사 파병을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 차치구, 손화중, 손병희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1894년 6월에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그해 9월에 전봉준이 4,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작했다.

전봉준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과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개남 대신 10월에 북접의 손병희논산에서 합류하여 2만 명의 군세가 되었고 남접 1만 명, 북접 1만 명 등 총 2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여명의 관군과 일본군은 미나미가 이끄는 200여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23일(음력 10월 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성하영윤성영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2만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금치 전투 편집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치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벱세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져 음력 12월에 전봉준은 체포되고,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패배요인 편집

 
경군이 보유했던 미국제 기관총.(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일본군은 후비보병이라 중화기는 전부 조선관군이 보유/운용하였다) 패배 요인으로 주목된다.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된 결전이었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으로는, 크게 1) 보유 무기의 심각한 열세, 2) 연합전선 실패로 인한 병력 분산, 3)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무엇보다 보유 무기 면에서 관군·일본 연합군이 갖고 있던 무기의 화력이 동학 농민군에 비해 월등했다. 농민군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수 있는 신형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막강한 화력을 지닌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을 갖추었기 때문에 동학 농민군을 손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동학 농민군은 모든 힘을 한곳에 모으지 못하고 분산됐다는 점이다.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의 농민군 정예부대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공주 전투에 함께하지 못했고 결국 농민군은 병력면에서라도 확실한 우위를 가질수 없었다.

셋째,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전투를 지휘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일본군이나 관군에 비해 훈련되어있지 않고 무기도 보잘 것 없는 농민군에 불과했다는 점과, 미리 공주를 점령하지 못한채 결국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불리한 지형적 조건에서 싸웠다는 점도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