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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만주어: ᡠᠯᠠ Ula, 한국 한자烏拉 오랍)는 해서여진후룬 구룬의 연맹 중의 한 세력으로 곧 적통이고, 해릉왕 시기에 송화강(만주어: ᠰᡠᠩᡤᠠᡵᡳ
ᡠᠯᠠ
Sunggari Ula) 하안(河岸)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생긴 지명인 우라홍니(烏拉洪尼勒, Ula Hongni)에 이주하면서 우라가 되었다. 후룬(扈倫, 만주어: Hūlun)국은 우라(烏拉, 만주어: ᡠᠯᠠ Ula), 호이파(輝発, 만주어: ᡥᠣᡳᡶᠠ Hoifa), 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 예허(葉赫, 만주어: ᠶᡝᡥᡝ Yehe)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편집

후룬 구룬에서는 1년을 사이에 두고 두 차례의 동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후룬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기에 후룬의 상층 인물들의 다수가 피살되거나 외부로 도주해 나갔다.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커시너가 피살되면서 그의 직계 후손들은 이곳저곳으로 도주했고, 그들은 훗날 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를 건립했다. 이후 커시너(克錫納, 몽골어: Kesine)를 죽인 바다이 다르한(巴岱達爾漢, 만주어: Badai Darhan)을 제거한 형식상의 훨운의 수장 구터이 주얀(만주어: Gutei Juyan)의 세력은 길림성 우라갸(烏拉街, 만주어: ᡠᠯᠠ
ᡤᡳᠶᠠᡳ
Ula Giya) 일대로 이동했다.

내부 동란으로 인해 세력이 위축되어 유명무실해진 후룬의 수장 지위는 구터이 주얀 이후 그의 아들 타이란(太蘭, 만주어: Tairan)에게 계승되었고, 그 후 타이란의 아들 부얀(布顏, 만주어: ᠪᡠᠶᠠᠨ Buyan)으로 이어졌다. 1561년, 부얀은 송화강 연안에 있는 홍니(洪尼, Hongni)에 성과 궁궐을 축조하고 버이러(貝勒, Beile)를 자칭했다.

홍니는 원래 우라홍니(烏拉洪尼勒, Ula Hongni)[1]라 불린 곳으로 '강가의 요새'를 뜻하는데, 금대 해릉왕 시기에 요새가 축조된 후에 줄곧 우라홍니 및 홍니로 불려왔다.

부얀이 후룬을 재건한 후 그 초기국가는 우라(烏拉, 만주어: ᡠᠯᠠ Ula)로 불리게 되었다. 부얀과 그의 후계자인 부간(布干, 만주어: Bugan)의 통치기에 울아는 외부적인 세력 확장을 하지 않고, 내치에 힘썼다. 외부적으로는 협력 세력인 하다국에 의존하여 인근 몽골 게력의 침입을 방비했다. 부간의 아들 만타이(滿泰, 만주어: Mantai)로 계승되었는데, 만타이는 예허국을 필두로 하는 9부족 연합군 3만의 누르가치 세력 침공 참전하였다가 대패하였고, 이후 압박에 시달리며 폭정을 일삼다가 1596년 피살당했다.

만타이 사후에 우라의 버이러는 누르가치에게 4년간 억류돼있던 만타이의 아우 부잔타이(布占泰, 만주어: Bujantai)로 이어졌다. 그는 누르가치에 양면 정책을 구사하며 난국을 타가해 갔고, 동부로 세력을 확대하여 동해여진을 세력권에 두었고, 조선의 북방까지 공략했다. 1603년부터 부잔타이는 함경도의 항화인을 공략하여 그들을 울아의 세력권에 흡수했고, 1605년에는 을 자처하며 함경도 종성의 동관진을 함락하고 첨사 전백옥을 살해했으며, 조선군을 건퇴에서 격퇴했다. 또한 교역을 열었고, 조선의 직책을 제수받기도 했다. 1607년에 부잔타이의 우라는 누르가치의 세력과 동해여진 와르카부(Warka Aiman) 사람 첨터허(Cemtehe)의 피오 성(Fio Hoton)을 두고 조선 함경도 종성 오갈암(烏碣巖)에서 충돌했고, 우라의 1만 병력은 건주여진 병력에 대패하여 5,000필과 갑옷 3,000벌을 노획당했다.

원문
○朔甲午/建州衛胡酋老乙可赤, 與忽刺溫大戰於鍾城 烏碣巖大破之。

— 선조수정실록

해석
건주위(建州衛)의 호추(胡酋) 노을가적(老乙可赤)이 홀라온(忽剌溫)과 종성(鍾城) 오갈암(烏碣巖)에서 크게 싸워 대파시켰다. 

부잔타이는 예허와 협력하여 누르가치에 대항했지만, 누르가치는 장남 책략이 많은 용사 추옌과 조카 아민(阿敏, 만주어: ᠠᠮᡳᠨ Amin) 타이지에게 병력 5천을 주어 우라의 수도와 가까운 이한산성(異憨山城, Ihan Alin Hoton)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우라 병력 1,000명이 죽었다. 1613년, 누르가치는 우라를 친정하여 우라군 1만이 전사하고 국주(国主, 만주어: ᡤᡠᡵᡠᠨᡳ
ᡝᠵᡝᠨ
Gurun-i Ejen
) 부잔타이는 예허로 망명했다. 이로서 2세기를 이어온 우라는 해서여진 후룬 연맹에서 세번째로 멸망하게 된다.[2][3]

씨족편집

우라나라(烏拉那拉, 만주어: ᡠᠯᠠ
ᠨᠠᡵᠠ
Ula Nara)는 오라씨(烏喇氏)라고도 한다.[4][5]인데, 무쿤(穆昆, Mukūn)과 하라(哈拉, Hala)의 연칭으로, 우라(烏拉, Yehe)는 무쿤(穆昆: 종족)이요, 나라(那拉, Nara)는 하라(哈拉: 성씨)이다. 만주족의 씨족 중 하나로 16세기 후반 후룬이 우라갸(烏拉街, 만주어: ᡠᠯᠠ
ᡤᡳᠶᠠᡳ
Ula Giya) 일대로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명말에 여진족의 우라부의 수장을 배출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대부분의 우라나라씨는 한성(漢姓)인 조(為)씨로 가장했고, 일부는 동(桐), 강(相) 성을 사용했다.[6]

각주편집

  1. 우라는 여진어로 혹은 하안(河岸)을 뜻하고, 곧 송화강을 의미하며, 홍니는 여진어요새를 뜻한다.
  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78~82쪽. ISBN 9788994606514. 
  3. 《대청태조무황제실록(大清太祖武皇帝實録)》2권 무신년 3월, "戊申年三月,太祖令子阿兒哈兔土門及侄阿敏台吉,領兵五千往兀喇部,圍異憨山城,克之,殺千餘人,獲甲三百副,盡收人畜而回。時兀喇布占太與蒙古廓兒沁瓮剛代貝勒合兵,出兀喇城約二十里,遙見我兵之勢難敵,遂回。是年太祖欲與大明國和好,謂群臣曰:「俗言一朝為惡而有餘,終身為善而不足,今欲與大明國昭告天地以通和好。」言畢,遂會遼陽副將撫順所備御,宰白馬祭天,刻誓辭於碑曰:「各守皇帝邊境,敢有竊逾者,無論滿洲與漢人,見之即殺。若見面不殺,殃及於不殺之人。大明國若負此盟,廣寧巡撫、總兵,遼陽道副將,開原道參將等官,必受其殃。若滿洲國負此盟,滿洲必受其殃。」誓畢,沿邊立碑以為記。布占太遣大臣來求曰:「吾累次背盟,獲罪於恩父,誠無顏面,若得恩父之女與我為妻,吾永賴之。」太祖復將生女木庫石公主妻之,遣侍臣以禮儀往送。"
  4. 金毓黻 编; (清) 杨同桂 辑 (1985). 《《辽海丛书·沈故》》. 辽沈书社. 327~328쪽. 
  5. 昭梿 (1980). 《啸亭杂录》. 中华书局. 316쪽. ISBN 9787101017519. 
  6. 赵力 (2012).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404쪽. ISBN 9787549702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