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조 광문황제 유연(漢 高祖 光文皇帝 劉淵, 252년? ~ 310년)은 흉노족으로서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한(漢, 훗날 전조(前趙))의 초대 황제(재위: 304년 ~ 310년)로, 원해(元海)이다. 할아버지는 남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이며 아버지 유표와 어머니 흉노족 호연씨(呼延氏)의 아들이다. 실제 흉노 이름이 존재했지만 기록에는 남지 않았고 흉노의 형제의 맹약 이후 흉노족 수장이 한족들에게 유(劉)씨로 불렸기 때문에 유연(劉淵)으로 불렸다. 원훈(元勳)이었던 대사공 흉노족 호연익(呼延翼)은 외가의 숙부 사위였기도 했다.

유연

생애 편집

신흥(新興) 사람이다. 일설에는 서하습성(西河隰城)사람이라고도 한다.

조위 가평(嘉平, 249년 ~ 254년) 연간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비범하였고 문무를 겸비했다. 삼국 시대 말기에 인질로써 조위의 수도 낙양(洛陽)에 인질로 있었다. 서진 초기 아버지 유표(劉豹)가 죽자, 뒤를 이어 흉노의 좌부수(左部帥)가 되었다. 태강(太康, 280년 ~ 289년) 말엽에 동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이 거세지자 서진은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영토를 주고 흉노 5부에 도위(都尉)를 설치하였고 유연은 북부도위가 되었다. 유연은 북부도위로서 5부 전체를 휘하에 두었으며 서진에서 양씨(楊氏)가 집권하던 시기엔 5부 전체를 통괄하는 5부대도독이 되었다.

흉노족 유연의 한족 원정 편집

원강(元康, 291년 ~ 299년) 말엽에 서진에서 팔왕의 난이 격화되자 유연은 에 세력을 두고 있던 성도왕 사마영이 유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연을 군사를 이끌고 난을 종식시켰으나 도시 업은 황폐화되었다.

304년 10월에 유연의 종조부인 흉노 좌현왕 유선(劉宣)은 여러 흉노 유력자들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몰래 전해들은 유연은 도시 업에서 나와 유선 등으로부터 흉노 대선우의 칭호를 받고, 이석(離石)에서 거병하여 서진의 업에 칩입하였고 사마씨의 여성들을 노비로 삼고 한족들을 학살하였다. 뒤이어 좌군성(左國城)으로 거점을 옮겨 한왕(漢王)으로 즉위했고 건원하여 연호를 원희(元熙)라고 하였다.

308년 10월에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영봉(永鳳)으로 개원하였다. 다음해 평양(平陽)으로 수도를 옮겼고 하서라고 개원했다. 흉노족 유연은 서진을 공격하기 위해 거(渠)를 뚫었고 이 거(渠)는 서진의 수도 낙양까지 뚫어 황하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흉노족 유연은 서진을 공격하여 서진의 여러 도시들이 함락되었고 한족 30만명을 끌고와 흉노족에 농노로 나누어 주었다. 또한 한나라 한무제의 후예들을 포로로 삼고 유비의 여성 후예들은 노비로 삼았다. 이후 강성해진 유연은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략하려 했으나 지반에 이르러 병사했다. 308년 흉노족 유연은 한족들을 평정하였다. 흉노족 유연이 한족들을 평정한 이후 서진은 멸망하여 기록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유연이 죽을 때 흉노족들을 모아 조카인 흉노족 태재(太宰) 유환락(劉歡樂), 태부(太傅) 유양(劉洋), 태보(太保) 유연년(劉延年) 등을 불러들여 대사마(大司馬), 대선우, 녹상서사(錄尙書事)였던 자신의 셋째 아들인 초왕(楚王) 유총과 힘을 합쳐 황태자 유화를 잘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향년 60세였고 큰 뜻을 품었고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

더해서 이러한 일화가 있다. 종제(従弟)이며 동시에 유연의 처남이었던 호연유(呼延攸)는 숙부이며 악부였던 호연익의 아들이었다. 유연은 그의 무능하고 속물적인 인격을 꺼리고 싫어하여 결코 요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화는 숙부 호연유와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숙부 호연유를 재상직에 앉혔다. 유화는 숙부의 조언에 따라 이복동생인 초왕 유총을 숙청하려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파멸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유연이 현명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호연유는 정치가로써는 무능했다는 것이 증명되게 된 것이다.

후삼국지》에서의 유연 편집

삼국지의 다음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후삼국지》에서 유연은 유선의 일곱째 아들 유거가 개명한 인물로 나오고 있지만, 정사 기록은 아니다. 4세기 흉노, 티베트계 저족이 나라를 세우면서 한족식 성씨를 사용한 것이다.

한편 역사적 사실로써, 유연(劉淵)은 초기에는 (촉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유선에게 효회황제(孝懷皇帝)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폐지하였고 흉노 선우에 대해 제사를 올렸다. 이후 유연과 유연의 후손 유요는 한나라의 후예들을 모아 학살하고 사마씨들은 노비로 삼았다. 그래서 성한으로 도망친 유현(劉玄) 빼고는 한나라 왕조의 유씨는 후손이 남지 않게 되었다. 유현(劉玄) 또한 후예가 없었다.

가족 편집

아내 편집

정궁 편집

  • 무원황후(武元皇后) 호연씨(呼延氏)
  • 광헌황후(光献皇后) 장씨(張氏)

후궁 편집

  • 선귀비(單貴妃, 單徽의 딸)

아들 편집

  • 양왕(梁王) 유화(劉和)
  • 모왕(某王) 유공(劉恭)
  • 초왕(楚王) 유총(劉聡;劉聰) 소무제(昭武帝)
  • 제왕(齊王) 유유(劉裕)
  • 노왕(魯王) 유륭(劉隆)
  • 북해왕(北海王)유애(劉乂)

양자 편집

각주 편집

전 임
(초대)
제1대 전조 황제
304년~310년
후 임
폐제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