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후(李光後, 1572~1598)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다.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여유(汝裕) 나주(羅州) 출신으로, 참봉(參奉) 이몽정(李夢禎)의 차남이고, 건공장군 소강진수군첨절제사 이광선(李光先, 1563~1616)의 친동생이며, 군자감 판관 이몽상(李夢祥, 1547~1608)의 조카이고, 시조(始祖) 고려(高麗) 삼사사(三司使)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 함풍부원군(咸豐府院君) 이광봉(李光逢)의 후예이다.

생애 편집

咸城君 李克諧의 7세손으로 1572年(선조 5) 나주에서 참봉 몽정(夢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형(兄) 이광선(李光先)과 함께 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형제는 내우외환의 엄중한 시기에 경사(經史)를 탐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무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약관 20세로 젊은 나이에 신묘별시 무과병과 4위로, 형 이광선은 29세의 나이로 신묘별시 무과을과 300명 선발 중 15위로 급제하였다. 한 집안에서 홍패(紅牌) 1장도 어려운데, 세 숙질이 연이어 홍패를 받았으니 가문의 명성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영광도 잠시 1592년(선조 25) 5월 1일(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였다. 세 숙질은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구국(救國)의 간성(干城)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이에 따라 일가족(一家族) 삼충신(三忠臣)이라는 호칭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란의 엄중함으로 세 숙질의 활약상을 담은 기록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였다.


숙부(叔父) 이몽상(李夢祥, 1547~1608)은 43세의 나이로 1589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 판관을 역임했다는 자료만 남았다. 형(兄) 이광선(李光先, 1563~1616)은 건공장군 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하였고, 행주대첩비, 이치대첩비에 등재되었고, 선무원종공신 녹권과 교지, 고문서 등 일부나마 남아 있어 유물 12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하였다.


이광후는 승정원 선전관(宣傳官)의 소임을 띠고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에게 임금(宣祖大王)의 명령을 전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추증했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후손마저 두지 못하고 절사(絶嗣)하고 말았다.

무과급제 편집

1591년(선조 24) 10월 20세로 武科에 응시하여 300명 중 무과 병과 4위 (39/300)를, 형과 나란히 나란히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광후는 훈련원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초수 되고, 형(兄) 李光先은 훈련원 현신교위(顯信校尉)에 초수 되었다.

임진왜란 편집

1592년(선조) 5월 1일(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종전과 전사 편집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의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

사후 관직 편집

사후에 언제 누가 어떤 절차로 고 이광후(故 李光後)를 숙천부사로 추증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종전 무렵 전사했다고 하나 전사자 명부에 없다. 사후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역임하였다 하나, 이광후는 관안 명부에도 누락 되고 없다. 종전 후 귀향하지 못했으니, 후손이 없다.


1591년(선조 24) 신묘 별시(別試) 무과 병과 제4위로 급제하여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초수 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 되었다.


1598년(선조 31) 종전 후 숙천부사(肅川府使)에 추증하였다. 후손마저 두지 못하고 절사(絶嗣)하고 말았다. 묘소는 나주 다시 사동(寺洞) 선영에 형 이광선 장군의 묘역 서남쪽 위에 가묘를 설치하였다.


공의 직계 후손은 없다. 1916년 2월 방 8세손 은서(恩緖)와 방 10세손 병헌(秉憲)이 묘전에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교위공문중(校尉公門中)에서 매년 음력 10월 15일 선대와 함께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2021년 방 14세손 이재흥(李載興)의 제안으로 매 3월 제3일요일 문촌공문중에서 형 이광선 장군과 함께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위 글로 추정해 보면 적어도 1595년 8월 7일 까지는 이광후(李光後)가 살아 생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 후손(이재향)이 추정하건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전투하다가 전사(戰死)를 하였는데, 그 당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마저 전사하게 되니 당시 지휘계통을 통해 이광후의 전사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광후도 전사하고 이순신도 전사하였기에, 그 당시 지휘관 명령계통이 단절되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죽음은 모두에게 알려졌지만, 선전관 이광후의 전사에 대해서는 몰랐을 상황을 상상해 보면, 뱃전에서 싸우다가 조총을 맞고 바다에 몸이 빠져 버렸기에 제 장졸들이 이광후의 시신을 발견치 못해 전사 자체를 몰랐을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사를 하더라도 배 안에 시신이 있었다면 시신 수습 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 해전이 끝난 지 400여 년이 지났지만, 전쟁터에서 전사해 돌아오지 못했다고만 구전으로 전해왔을 뿐, 모든 문헌에서 누락 되고 없다. 지하에 계신 조상님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내 선대가 만든 족보에도 통정 숙천부사 등재가 전부다.


2001년 이광선 장군 충의비 수립과정에서 후손 이재향이 하바드앤칭도서관이 소장한 신묘 별시 문무과 방목에서 최초 확인하였고, 2006년 충무공 난중일기 초본에 등재된 사실을 방 후손 이재향(李載香)이 최초로 확인하였다.

난중일기 원문 편집

初七日丁未。雨雨。朝。豚蔚與許宙及玄德麟。虞候同船出去。晩。兩防將及忠淸水使同話。○夕。標信宣傳官李光後持有旨來。則以元帥領率三道舟師。徑入賊窟事。與之言達夜。

初八日戊申。雨雨。宣傳官出去。

위 원문을 국역하면 “을미년〔1595년〕 8월 7일 비가 계속 내렸다. 저녁에 표신(標信)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李光後)가 임금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원수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8월 8일 오전 비 오는데 선전관이 나갔다.”

일가족 삼충신 편집

본인 [무과] 이광후/ 선조 24년(1591) 辛卯別試 병과(丙)科) 4위(39/300)

형님 [무과] 이광선/ 선조 24년(1591) 辛卯別試 을과(乙科) 15위(16/300)

숙부 [무과] 이몽상/ 선조 22년(1589) 己丑 增廣試 병과(丙科) 11위(19/28)

참고 문헌 편집

신묘별시문무과방목(1591년)

선조실록

난중일기(1595년)

금성읍지(1897년)

가계 편집

[부(父)]

성명 : 이몽정(李夢禎) 참봉(參奉)

[조부(祖父)]

성명 : 이운(李雲) 충순위(忠順衛)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진충(李盡忠) 현감(縣監)

[안항(鴈行)]

형(兄) : 이광선(李光先) 1591[武] 1601년 소강진(所江鎭) 첨사(僉使), 1605 임란 공신

제(弟) : 이광립(李光立)

숙부(叔父) 이몽상(李夢祥) 1589년[武]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