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웅 (1919년)

이기웅(李起雄, 1919년 12월 16일(1919-12-16) ~ 1984년 2월 29일(1984-02-29))은 대한제국 독립운동가이다. 종교는 개신교(성결교)이다.

서산 이기웅 장로
원어이름李起雄
당교회아현성결교회
개인정보
출생1919년 12월 16일(1919-12-16)
일제 강점기 조선 충청남도 서산군 서산면 동문리
사망1984년 2월 29일(1984-02-29)(64세)
대한민국 서울 마포구
교파개신교(성결교)
거주지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산군 서산읍 읍내리 260번지
학력경성신학교 중퇴

생애 편집

일생 편집

충청남도 서산(瑞山) 출생이고 아호도 서산(瑞山)이다. 어린 시절 일본식 이름은 야마모토 다치오(山本起雄)이며 일제 강점기 말기 시대 가명은 김기웅(金琦雄)이다.

그는 1943년 7월경 그리고 같은 1943년 8월경 충청남도 서산군 서산읍 주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애초에 그는 1943년 4월 성결교회(聖潔敎會)가 운영하는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1943년) 5월 학교가 일제에 동조하지 않고 천황(天皇)도 심판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하여 폐교 당하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서산성결교회 담임인 정재학(鄭在學) 목사 등과 함께 자주 시국에 대해 논하였다.

1943년 7월 그는 정재학 등에게 "미영(美英) 양국은 철과 기계의 제작이 상당히 발달해 왔으므로 금번 태평양 전쟁에서 미영이 승리할 것이 틀림없다. 미국 그리고 영국 두 양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대한제국 민본주의 군주제 조선 황조도 독립하고 우리의 교회도 상당히 발전하여 기독교 신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라고 하였다. 또 같은 해(1943년) 8월 8일에는 "일본의 군마(軍馬) 사육장에서 인도인(印度人)이 군마를 죽였다"는 등의 시국담을 유포하였다. 결국 이기웅은 이 일로 붙잡혀, 1944년 3월 12일 충청남도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청에서 소위 육군 형법·보안법 등으로 인하여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5년 3월, 만기출감하였다.

그 후 1945년 충청남도 서산 향리에서 광복(8·15)을 목도한 그는 1948년 3월부터 1948년 6월까지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직위를 잠시 지냈으며 1948년 6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사후 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8년 8월 15일을 기하여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외부 링크 편집

  • [1]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