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품왕(伊尸品王, ? ~ 407년 4월 10일)은 금관가야의 제5대 국왕(재위: 346년 7월 8일 ~ 407년 4월 10일)이다. 시호는 명왕(明王)이다.

이시품왕
제5대 금관가야 국왕
재위 346년 ~ 407년
전임 거질미왕
후임 좌지왕
이름
김이시품(金伊尸品)
신상정보
부친 거질미왕
모친 아지부인(阿志夫人)
배우자 정신부인(貞信夫人)

영화(永和) 2년[1]에 즉위하여, 의희(義熙) 3년[2] 정미(丁未) 4월 10일에 (崩)할 때까지 약 62년 동안 금관가야의 왕으로 통치하였다. 왕비(王妃)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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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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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년 백제 근초고왕목라근자(木羅斤資)로 하여금 탁순국(卓淳國)에 모여 가야를 공격한 신라를 격파했다한다.

신라가 왜에 보내는 사신을 끊자, 일본은 소츠히코를 파견하였으나 미인계에 속아서 뜬금없이 금관 가야를 침공했다. 이 결과 가야의 왕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백제로 도망갔고,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가 나서서 겨우 도성과 땅을 되찾았디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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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가야와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광개토대왕에게 원병을 청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편성해 남하해 왔다. 이때 왜군을 퇴각하고 가야까지 쫓아와 종발성(從拔城: 지금의 부산)이 함락되었다.

칡꽃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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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산 아래에 사는 도공 조씨의 딸 설희와 도공 조씨의 수제자 쇠바우가 둘은 서로 사랑하여 약혼을하였는데 하지만 부바우가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과의 전쟁에 끌려가 설희는 정혼 언약을 끝까지 지키며 기다리고, 전쟁 포로가 돼 왼팔 불구가 되어 돌아온 쇠바우와 밤 늦게 까지 도예작품을 만들며 살았던 부부를 마을 사람들이 ‘칡넝쿨 부부’라 불었다. 큰 부를 쌓아 나라에 흉년이 올 때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며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시품왕은 칡넝쿨 부부를 불러 위로하고 큰상을 내렸다. 이들 부부가 죽은 뒤 가야 사람들은 칡넝쿨 부부를 기리기 위해서 해마다 여름 칡꽃이 필 때면 여인네들은 머리에 칡꽃을 꽂고 술, 떡, 차를 차린 후에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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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왕 : 거질미왕(居叱彌王, ? ~346 재위:291~346)
  • 모후 : 아지부인(阿志夫人, ? ~ 347)
    • 국왕 : 이시품왕(伊尸品王, ? ~407 재위:346~407)
    • 왕비 : 정신부인(貞信夫人) -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 장남 : 좌지왕(坐知王, ? ~421, 재위:407~421)
      • 며느리 : 용녀(傭女)
      • 며느리 : 복수부인(福壽夫人) -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전 임
거질미왕
제5대 가락국의 국왕
346년 7월 8일 ~ 407년 4월 10일
후 임
좌지왕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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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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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거질미왕
제5대 가락국의 국왕
346년 음력 7월 7일 ~ 407년 음력 4월 10일
후 임
좌지왕
  1. 영화(永和)는 동진(東晉) 목제(穆帝)의 연호로 345년 ~ 356년까지 사용되었다. 따라서 346년이다.
  2. 의희(義熙)는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3번째 연호로 405년 ~ 418까지 사용되었다. 의회 3년인 정미(丁未)년은 407년이다.
  3. 권2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 이시품왕(伊尸品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