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 4현(任那四縣)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고대 한반도 남부의 상타리(上哆唎) · 하타리(下多唎) · 사타(娑陀) · 모루(牟婁)의 4개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개요 편집

《일본서기》 권17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6년(512년) 겨울 12월조에는, 백제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별도로 임나국(任那國)의 상타리 · 하타리 · 사타 · 모루의 4현을 청한 것에 대해, 왜국의 다리노쿠니노미코토모치(哆唎國守)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穗積臣押山)가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왜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아침 저녁으로 다니기 쉽고 닭과 개의 주인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주어서 나라를 합치더라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태로울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곳이 된다면 몇 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며 백제의 편을 들었고, 오오토모노오무라치 가나무라(大伴大連金村)도 이에 동조해, 왜에서는 모노노베노오무라치 아라카히(物部大連麤鹿火)를 백제에 보내 칙을 선포하려고 했다. 아라카히의 처가 스미요시 대신(主吉大神)의 오진 천황에 대한 신탁과 진구 황후의 고사를 들먹이며 남편을 말렸고 아내의 권유대로 아라카히는 병을 핑계대며 사신으로 가지 않으려 했지만, 왜국은 기어이 다른 사신으로 교체해 백제에 보내 임나 4현의 백제 영유를 인정할 뜻을 밝혔다. 이때 마침 다른 문제로 이를 뒤늦게서야 들은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 오에 황자(大兄皇子)가 전에 뒤늦게 칙을 선포한 것을 알고 놀라서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다시 백제로 보내어 백제의 객(百濟客)에게 의사를 철회하겠다고 전했지만, 백제의 사신은 "부왕께서 이미 결정한 일인데 아들이 나서서 그걸 함부로 고칠 수는 없다"며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이 기록 말미에 당시 오토모노 가네마로와 호즈미노 오시야마가 백제의 뇌물을 받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적고 있다.

임나 4현의 위치 편집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고 이를 한반도 식민통치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황국사관에 입각해, 일본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의 식민사학자들은 당시 일본이 백제의 요청으로 한반도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임나 땅의 일부를 할양해준 것으로 설명하면서, 임나 4현의 위치도 영산강 중상류의 전남 지역에서 찾고자 하였다.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경우 임나 4현의 전남 서부에 비정하고, 각각 전북 동북부에서 충남 동남부(또는 전남 서부 영산강 일대), 구례 부근, 전남 서부 영산강 서안으로 비정하였다. 임나가 가야고 전남 전북이면 전라도도 가야 영토라는 말이 된다. 한편 한국의 사학자 김정학(金廷鶴)은 임나 4현을 섬진강(蟾津江) 하구에서 낙동강(洛東江) 유역에 이르는 함양, 산청 등지의 가야와 백제 사이의 완충지대로 보았고, 천관우(千寬宇)는 낙동강 상 · 중류 방면의 의성군 다인, 칠곡군 인동, 예천으로 각각 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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