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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억령(林億齡, 1496년 ~ 156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선산,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이다. 해남 출신이며, 박상의 문인이다.[1]

목차

생애편집

임득무(林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수(林秀)이고, 아버지는 임우형(林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 음성 박씨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박상 형제에게 글을 배웠다.[2] 1516년(조선 중종 11) 전체 4위로 진사가 되었고,[3]1525년(중종 2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 전체 29위로 급제하였다.[4] 그 뒤 부교리·사헌부 지평·홍문관 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으로 일했다.

1545년(조선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백령이 원종공신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격분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을사사화가 지나간 뒤인 1552년에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를 역임했다.

저서로 《석천집》이 있다.

문학 세계편집

김인후와 더불어 호남계 문단의 중진이다. 인품이 고매하며 시 또한 사람과 같다는 평을 받았다. 고금의 각체시를 두루 익히면서 일생 동안 시를 지어서 그의 문집이 대부분 시로 채워져 있다. 대표작은 7언절구 〈示友人〉이다. 허균은 이 작품을 가리켜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했다.[1]

평가편집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으나 관리로서는 마뜩치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각주편집

  1. 민병수 (1996년 11월 30일). 《한국한시사》. 태학사. 253~254쪽. ISBN 89-7626-175-5. 
  2. 《국역 국조인물고》 권33 휴일(休逸) 임억령의 묘표(墓表)
  3. “과거 및 취재 > 생원진사시 > 임억령(林億齡)”.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2013년 1월 14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과거 및 취재 > 문과 > 임억령(林億齡)”.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2013년 1월 14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임억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