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책동(立省策動)은 원 간섭기 시절에 원나라에 부역했던 부원배들이 고려를 원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도록 획책한 사건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 편집

1259년에 고려-몽골 전쟁이 끝난 후 1270년에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개경 환도 및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과 몽골의 제국대장공주 간 국혼이 성사되면서 고려는 몽골 제국의 내정간섭을 받는 제후국이자 부마국이 되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 추진되면서 일본과 가까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일본 원정을 준비했는데 2차례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정동행성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정동행성은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과 같은 지방행정기관이 아니었고, 오히려 고려 국가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지위를 원나라의 한 행성으로 규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관이었으므로 이를 폐지하고 다른 행성들과 같은 새로운 행성을 설치하자는 것이 바로 입성책동이다.

4차례의 입성책동 편집

1차 입성책동 편집

제 1차 입성책동은 충선왕 원년(서기 1309년)에 고려의 역적 홍복원의 손자 홍중희에 의해 제기되었다. <원사>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3월 기축일에 요양행성 우승상 홍중희가 고려국왕 왕장(王章)이 국법을 받들지 않고 포악을 자행하고 있다고 소를 올렸다.(三月己丑遼陽行省右丞洪重喜訴高麗國王王章不奉國法恣暴等事)" - <원사> 권 23 본기 23 무종 2

충선왕이 원 무종에 의해 심양왕으로 책봉을 받고 요양, 심양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게 되자 위협을 느낀 홍중희가 위와 같이 충선왕을 탄핵하고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충선왕은 고려왕에 복위한 직후부터 단행했던 개혁정치의 일부를 철회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1309년에 홍중희가 조주(潮州)[1]로 유배됨으로써 입성 논의도 잠잠해졌고, 충선왕 4년(서기 1312년) 6월에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두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고려사>에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록은 이렇다.

"무진일에 원나라가 제도를 내려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처음에 홍중희가 중서성에 소를 넣어 행성을 세우고자 했으나 왕이 대대로 원나라에 신하로 복속한 공을 주장하자 황제가 그리 결정한 것이다.(戊辰元降制令高麗毋置行省初洪重喜訴于中書欲立行省王以祖宗臣服之功奏之故帝有是命)" - <고려사> 권 34 세가 34 충선왕 2

2차 입성책동 편집

제 2차 입성책동은 충숙왕 10년(서기 1323년) 1월에 부원배인 오잠유청신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2] 이보다 앞서 1320년에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실각하고, 고려인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다음해에는 충숙왕이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에 억류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심왕 왕고(王暠) 등이 충숙왕을 참소하는 가운데 고려에서는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났다. 유청신과 오잠은 왕고의 편에 서서 입성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번의 입성논의는 상당히 진전되어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이제현 등이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는 세조구제 등을 들어 입성책동의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 집현전대학사 상의 중서성사(集賢殿大學士商議中書省事) 왕약(王約), 참의중서성사 회회(回回) 등이 반대함으로써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1325년 윤 1월에 원나라에서 최종적으로 고려에 행성을 세우려던 계획을 철회하면서 2차 입성책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3차 입성책동 편집

제3차 입성책동은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한 직후에 장백상(將伯祥)에 의해 추진되었다. 장백상은 중국의 강남(江南)사람으로 충숙왕 때 정동행성 낭중(郎中)을 지낸 바 있었다. 이 해에 충숙왕이 퇴위되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그 목적은 분명하지 않으며, 충혜왕이 직접 원나라의 우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에게 요청함으로써 곧 입성논의가 중지되었다.[3]

장백상은 계속 원나라에 머물다가 충숙왕이 복위 1년에 고려로 돌아와서 충숙왕의 복위를 전하면서 국새와 창고를 접수하였으며, 이후 정동행성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뇌물을 밝혔고, 충혜왕의 폐행 20여 명을 장류시켰다. 이 충혜왕 폐행들이 원나라에 투고함으로서 원나라에 의해 수감된다.[4][5]

4차 입성책동 편집

1343년(충혜왕 복위 4년)에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충혜왕이 탐음부도(貪淫不道)하므로 고려에 행성을 세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며, 대신 충혜왕을 퇴위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3]

의의와 평가 편집

총 4차례의 입성책동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고려는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남긴 '세조구제(世祖舊制)'를 들어 입성책동을 저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입성책동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간섭은 받았을지언정 식민지나 직할령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부원배들의 책동에 의해 제기되었던 4차례의 입성문제는 실행되지 않고 모두 좌절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국가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입성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새로운 행성을 두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정동행성이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과는 다른 형식적인 기관이었음을 말해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3]

각주 편집

  1. 광동성 조안시라고 한다.
  2. <고려사> 권 35 세가 35 충숙왕 2
  3. “입성책동(立省策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1년 11월 19일에 확인함. 
  4. “장백상(蔣伯祥)”. 2021년 11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11월 19일에 확인함. 
  5. 각주 4에 따르면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益柱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