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앙투안 루셰
장앙투안 루셰(프랑스어: Jean-Antoine Roucher, 1745년 12월 19일 ~ 1794년 12월 18일)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작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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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앙투안 루셰(프랑스어: Jean-Antoine Roucher) |
출생명 | 장앙투안 루셰(프랑스어: Jean-Antoine Roucher) |
로마자 표기 | 프랑스어: Jean-Antoine Roucher |
출생 | 1745년 12월 19일 프랑스 왕국 옥시타니 에로 (데파르트망) 몽펠리에 |
사망 | 1794년 12월 18일 (48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센주 (프랑스) 파리의 아롱디스망 메트로폴 메트로폴 뒤 그랑 파리 파리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식민제국 근세 프랑스 프랑스 왕국 프랑스 입헌왕국 프랑스 |
민족 | 프랑스 식민제국 근세 프랑스 프랑스 왕국 프랑스 입헌왕국 프랑스 |
성별 | 남성 |
언어 | 프랑스 |
직업 | 시인, 번역가, 작가, 저술가 |
종교 |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
필명 | 장앙투안 루셰(프랑스어: Jean-Antoine Roucher) |
등단 | 1777년 다달이 |
활동기간 | 1777년 ~ 1794년 |
장르 | 시 (문학) |
사조 | 계몽주의 |
스승 | 볼테르 |
배우자 | 유랄리 루셰 |
동거인 | 앙드레 셰니에 |
형제 | 클로드 루셰데라 |
친지 | 프랑수아조제프 루셰 (중조카) |
주요 작품 | |
달: 시... - 기본 소스 에디션 | |
묘소 | 픽푸스 묘지 |
전기
편집루셰는 재단사의 아들로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그의 상피세포는 그에게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의 호의와 소금세 징수원의 직위를 안겨줬다. 다달이라는 제목의 그의 시 (문학)는 1779년에 발표됐고, 원고에서는 칭찬을 받았지만, 19세기까지 비평적으로는 혹평을 받았다. 시 (문학)의 비평적 실패에 대한 앙투안 드 리바롤의 악의적인 재치,《이 배는 금세기 최고의 난파선이었다》은 가장 정교한 구절 중 하나가 난파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1]
루셰는 볼테르의 제자자 프랑스 혁명의 친구였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에 있어서는 온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반자코뱅파를 주재했고, 1792년 파리의 여행에 실린 보충 기사에서 대중 선동가들의 폭정을 비난했다. 그는 1793년 10월 4일에 체포됐고, 생라자르 수감자들 사이의 음모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1794년 12월 18일에 앙드레 셰니에가 단두대에 오른지 2개월 만에 텀브릴에서 단두대에 올랐다.[1]
1790년에 루셰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번역했다. 감옥에서 보낸 그의 편지는 그의 사위가 포로가 된 것에 대한 위로라는 제목으로 편집했고, 그의 죽음은 방대한 작가인 그의 극작가 동생 클로드 루셰데라에 의해 1834년 비극의 주제가 됐다.[1]
각주
편집- ↑ 가 나 다 크리숄름 & 19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