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배걸

정배걸(鄭倍傑, ? ~ 1051년)은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오늘날 초계 정씨(草溪 鄭氏)의 시조이다. 《고려사》 문종세가에는 정걸(鄭傑)이란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초계의 변천편집

초계는 경상도의 한 군으로 草八兮(초팔혜), 八溪(팔계), 淸溪(청계)라고도 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초계로 일컬었다가 합천(陜川)군에 속하였으나 종인 7세 수기(守琪)공이 합단적 토벌에 공이 있어 충숙왕때 군으로 승격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초계군으로 군수를 두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군폐합으로 합천군에 합군되어 초계, 쌍책, 덕곡, 율곡, 적중, 청덕, 대양 등 여러면으로 구획되었다.

생애편집

광유후는 11세기 전후의 인물로서 詩書(시서)에 능하고 유학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로서 사학의 창시자이니 후진 양성에 큰 업적을 남기고 관직은 禮部尙書(예부상서), 中樞院使(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광유후 이전의 선세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수 없다. 광유후는 7세에 시서에 능통하였고 현종 때인 1017년(현종 8) 3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1] 1035년(정종 1) 1월 좌습유(右拾遺)·지제고(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1047년(문종 1) 4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정신(金鼎新)등 20명을 선발하였다. 그 후 1049년(문종 3) 2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내고 같은 해 3월 비서감(秘書監)·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거쳐 1050년(문종 4) 1월 중추원사(中樞院使)·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고 1051년(문종 5) 중추사(中樞使)·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으며 8월에 졸했다. 문종 34년(1080년) 왕명으로 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 守太尉 門下時中(수태위 문하시중) 上柱國(상주국) 光儒侯(광유후)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弘文(홍문)이다.

고려사절요 문종 34년(1080년) 2월 봄 2월에 제하기를 " 고 門下侍中 王寵之(왕총지)와 禮部尙書 鄭倍傑(정배걸)은 모두 충성스럽고 곧기가 짝이 없으며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으니 시대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내 어찌 잊으리오. 남다른 은총을 내려 과인의 어진이를 사모하는 뜻을 밝혀야 하겠으니 寵之(총지)에게는 수태사 중서령을 倍傑에게는 수태위 문하시중 광유후를 추증하라 하였다"

사학창시편집

고려 초기에는 거란의 침입으로 국력이 피폐하여 국가에서 문교에 힘을 쓸 틈이 없는 처지였으므로 학자들이 사숙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게 되어 세칭 十二徒(십이도)라 하였다. 그중 文憲公(문헌공) 최충공이 세운 文憲公徒(문헌공도)와 광유후가 세운 弘文公徒(일명 熊川徒)가 가장 성왕하였다는 사적이 儒宗錄(유종록)에 실려있는 사실로 보아 광유후가 儒道(유도)에 끼친 공적이 청사에 빛남을 알 수 있다. 문종대에 일찍이 사숙(私塾)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려는 자들이 소속되어 공부했다. 光儒侯는 고려사에 1051년 8월 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文憲公은 1055년 치사하여 사숙을 설립했다는 기록을 비교해 볼때 문헌공이 사숙을 설립하기 전에 光儒侯께서 弘文公徒을 설립하였다고 볼수 밖에 없으므로 光儒侯가 고려시대 사학의 시원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가족관계편집

부인 최씨는 현숙하였으나 후사가 없었으므로 친정 일가집 딸을 권하여 부실로 삼아서 문종 5년(1051년)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2세 貞簡公 휘 文(문)이다. 貞簡公이 아드님 세분을 두시니 형부원외랑 復公(복공)공, 시군기소감 復卿(복경), 復儒(복유)[2]공이다.

묘소편집

光儒侯의 묘소는 草溪 玉田에 있으니 상단 쌍분은 시조와 부인 崔氏의 묘소이고 하단의 묘는 부실 崔氏의 묘소이고 동쪽에 묘단비가 있다. 조선시대 명종 17년(1562년) 16세손 恒齋(항재) 宗榮(종영)공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초계에 순시차 왔다가 시조 묘소를 찾지 못하고 동구에서 望拜(망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시조께서 돌아가신지 500여년이 지난 그때는 실묘상태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후 李又新(이우신)이란 자가 묘역을 범하여 표석을 파내버리고 그 애비를 몰래 묻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역군중에 문자를 알아보는 자가 있어 22세손 永章(영장)공, 永文(영문)공 형제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산송을 일으키게 되었다. 숙종 14년(1688년) 10월 23세손 弘佑(홍우)공이 訴頭(소두)가 되어 내외손 61인과 각파종인 대표 385인이 총궐기 하여 형조에 산송을 제기하였다. 수년간의 산송끝에 사필귀정으로 우리가 승소하여 범장한 李又新은 형벌주어 귀양보내고 그 뫼는 파내었다. 숙종 18년(1692년) 9월 외손인 경상우병사 尹就商(윤취상)공의 주선으로 묘소의 구광을 개수 봉축하고 석물을 세워 묘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니 실로 시조께서 돌아가신지 642년만에야 완전히 되찾게 된 것이다. 지금의 墓檀碑(묘단비)는 26세 종손 煥猷(환유)공이 수건한 것이다. 그후 헌종 1년(1835년) 또다시 卞(변)모가 묘소 국내에 유장한 변이 생겼다. 종인들이 초계군수에게 제소하였으나 묘소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라 하여 파내기를 미루니 원근의 제족이 분개하던 중 초계종인 25세손 七福(칠복)공이 분연히 의기를 발하여 단독으로 卞가의 뫼를 파내고 관에 자현하니 헌종 14년(1848년) 일이었다. 七福공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나 3년만인 1851년 풀려났으며 종인들이 그 위선 정신을 찬양하였다.

玉田齋(옥전재)편집

본 재실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묘소 개봉후 신도비 수건을 전후하여(1692~1765)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종 12년(1861년) 4월 21일 중수 상량문(후손 鳳成 근술)에 의하여 그때 중수된 건물이 현존 재실임이 분명하고 정문, 서문, 삼성당, 고직가등 부속건물도 같은 시대의 건축물일 것이다. 1954년 3월 26세 完圭공이 사우를 중수하고 묘소 개사초, 집기등을 비치하여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본 재실은 경향 각지에 산재한 후손들이 성묘차 초계에 왔을 때 , 특히 춘.추향 향사에 참집하는 후손들이 선대의 유덕을 기리고 종중 대소사를 의논하며 인륜도덕과 충효사상을 강론하는 장소이다. 또한 인근 사림들의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본 지방 유도 진흥의 본산으로서의 역할도 적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玉山祀(옥산사)편집

정조 23년(1799년) 7월 22일 통문된 玉山祀 창립 출문(유림 鄭必榮외 15인 명의)에 의하여 그때 창건된 것이다. 순조 8년(1808년) 2월 9일 초계 향교회 중 반수 金宅立 등 26인 연명으로 된 옥산사 배향 통문에 의하여 光儒侯, 貞簡公 양위를 배향한 것이며 당시 초계 楊(양)군수의 주창으로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유림 봉사로 향사되었다. 고종초 흥선대원군 집권당시 서원훼철령이 내려지기 직전 27세 雨田 顯德공이(당시 동래부사) 그 기미를 예측하고 밤을 도와 옥전에 와서 玉山祀 사판을 내리고 자신이 지은 貞簡公 神道碑 비문을 세워 비각으로 둔갑케 한 기지로 훼철을 모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玉山祀를 비롯한 玉田齋 건물이 오늘까지 온전히 보전 될 수 있는 것은 雨田公의 덕이라 할 수 있다.

神道碑(신도비)편집

숙종 36년(1710년) 21세 宇柱공이 진주목사로 와서 묘소 언덕넘어 남쪽 산 기슭에 神道碑를 세우고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그후 오랜 세월에 훼손이 심하였으므로 23세 종손 弘佐공이 통제사가 되어 신도비를 수건하고자 석재를 갖추었으나 각수치 못하였다. 25세 종손 汝稷공이 통제사로 와서 조부의 유지를 이어받아 각수하니 때는 영조 41년(1765년)이었다.

  • 22세 사마 鳴玉 찬
  • 25세 종손 통제사 汝稷 수건
  • 22세 유사 熙慶 전,서

광무 2년(1898년) 28세 松里 鳳時공이 창녕군수로 와서 여러종인과 협력하여 재 수건하고 비각을 세우고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28세 昌時공(관동파 종손)이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翰林學士 郭元(곽원)이 지공거가 되어 鄭倍傑등 진사 11인을 선발하였다. 곽원공은 후에 參知政事, 推誠文理功臣 上柱國을 지냈다.
  2. 보책에는 鄭福公, 鄭福卿, 鄭福儒로 등록되어 있으나 福公공의 지석에 "고려 상서 형부원외랑 鄭公의 諱는 復公이요 자는 餘慶이니 文宗때 相國 鄭倍傑의 손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福卿공의 묘지문에 "공의 성은 鄭氏이고 이름은 復卿이며 자는 世貴로 草溪사람이다...."로 기술되어 있다. 보책의 기록보다 지석이나 묘지문의 기록이 신뢰성이 높다고 보고 휘자를 정정하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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