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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大韓耶蘇敎長老會神學校, 대한야소교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 1901년 장로교의 선교부와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가 평양에서 개설한 장로교 교역자(敎役者) 목사 교육기관이었다.

목차

설립 및 운영편집

최초 학교의 공식명은 대한야소교장로회신학교(大韓耶蘇敎長老會神學校)였지만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의 강요로 '대한' 대신에 '조선'이란 교명을 사용하였다.[1] 초창기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은 1890년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들이 학생들을 서울로 보내 '신학반'(神學班)이라는 이름으로 1개월씩 공부시키던 과정이 있었으나, 이는 단기 과정에 불과하여 체계적인 한국인 목회자 양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 선교사는 미국 선교부에 목사양성소가 필요함을 알린 후 설립허가 및 설립기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1900년 봄에 마포삼열 선교사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인 방기창과 김종섭을 목사 후보생으로 예정하고 신학예비과정을 시작하였다.[2]

이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등 4개의 장로교단의 선교부로 구성된 장로교선교공의회가 신학교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1901년 5월 15일 평양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라고도 불린다)를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으로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취임하였다.[3] 평양 대동문 옆 술막골에 있던 마포삼열 선교사 집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1907년 6월 20일 길선주(40세), 방기창(58세), 서경조(58세), 송인서(40세), 양전백(39세), 이기풍(40세), 한석진(41세) 등 7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에서 한국 최초의 7인 목사가 되었다.

이후, 1907년 미국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Mrs. Nancy "Nettie" Fowler McCormick[4])가 보낸 5천달러의 지원금으로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있는 6,000여평의 대지에 1908년 5월 15일 새로운 신학교 교사를 신축하는 착공식을 갖고, 이듬해인 1909년 준공되어 당시 138명의 신학생이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

설립당시인 1907년의 교수진은 주로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이었으나, 이후 다른 장로교단의 선교사들도 참여하였다. 설립당시 교수진은 북장로교 선교사 중 마포삼열, 이길함, 언더우드, 소안론, 한위렴, 배위량, 편하설, 곽안련 목사가 있었고, 남장로교 선교사 이눌서 목사 및 호주장로교 선교사 왕길지 목사가 있었다.[5] 1918년부터 '신학지남'이라는 학술지를 간행하였고, 이눌서 선교사의 주도하에 성경사전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1925년 10월 20일 라부열 (R.L. Roberts) 박사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폐교편집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계 학교와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1935년에 이르러 평양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장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건을 이유로 숭실학교 등이 강제 폐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급기야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예배당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일부 목사들과 선교사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가결을 강행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교육기관으로서 신학교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열흘 후인 9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던 신학교의 개강을 무기한 연기하였다.[6]

이후 통신으로 공부하여 한 학기를 더 마친 52명에게 1939년 3월 28일자 제34회 졸업을 인정하는 증서를 우편으로 배달되었고, 총 7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채 사실상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신학교육편집

평양신학편집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던 총회의 신학교육 기관이 폐교되자, 한국인의 신학교를 개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순응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1939년 4월 11일 평양신학교가 개교되었다. 교장으로 취임한 채필근 목사의 이름을 따라 '채필근신학교'로 불리거나 '후평양신학교'로 불리며, 적극적인 친일 교육과 정통성을 벗어난 신앙 교육으로 인하여 이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잇는 학교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7]

만주신학교편집

신사참배 반대 등을 이유로 만주로 이주한 다양한 교파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1941년 만주에 있던 장로교의 여섯 노회는 분립하였고, 다른 교파인 감리교회, 조선기독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과 연합하여 만주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하였고 신학교육기관으로 만주신학교를 세웠다.[8]

조선신학교편집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자 1939년 3월 27일 서울에 장로교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채필근 목사는 위원장이었으나 평양신학교 설립에 가담하였다. 승동교회 장로 김대현이 50만원을 기부하여 조선신학교의 설립인가를 받고 승동교회에서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박사 등을 교수로 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940년 9월 12일 제29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을 인준하였고, 1946년 감리교와 함께 개최한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가하였다.

조선신학교의 신학적인 경향이 신정통주의를 도입하는 진보적인 신학을 추구하자 1947년 제33회 총회에서 몇몇 목사들이 새로운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였고, 1949년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하였다. 이후 조선신학교는 1953년에 이름이 한국신학대학으로 바뀌어 현재 한신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함께보기편집

각주편집

  1. 교회용어사전
  2. 박용규 (1974년 6월) [신학지남 1974년 여름호(통권 제165호)]. 《평양신학교 초기 편사》. 91쪽. 
  3. 평양장로회 신학교 설립, 국민일보, 2011년 9월 25일
  4. 사이러스 맥코믹(Cyrus McCormick)의 부인
  5. 박용규 (1974년 6월) [신학지남 1974년 여름호(통권 제165호)]. 《평양신학교 초기 편사》. 92쪽. 
  6. 신사 참배와 한국 교회, 코람데오닷컴, 이만열 교수, 2012년 12월 11일
  7. 일제 하에서의 신학교육, 국민일보, 2012년 4월 22일
  8. 만주의 신학교는 교파연합이었다, 한국장로신문, 2012년 1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