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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과학기술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그 발전 양상에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전기와 후기는 임진왜란을 경계로 나누어지는데, 전기에는 주로 활자, 의학, 천문학, 무기 제조 기술 등 실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였고, 후기에는 서양 문물의 전래로 인하여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활동이 두드러졌다.

목차

조선 전기편집

활자편집

조선시대의 교육 진흥에 따른 활발한 서적 편찬 사업은 활자의 개량과 인쇄술 및 제지술의 발달을 크게 자극시켜 많은 기술의 진전이 있었다.

이미 13세기경에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쓰이기 시작한 금속활자는 조선 초기 이후 더욱 개량되어, 계미자(태종 3년)·경자자(세종 3년)·갑인자(세종 16년) 등이 차례로 주자소에서 주조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갑인자(甲寅字)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하기에 편하게 주조되었을 뿐 아니라, 활자가 20여만 개나 되어 가장 우수한 활자로 꼽힌다.

활자 만드는 데 쓰는 금속은 처음에는 납이었으나 세종 18년부터는 그보다 강한 구리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만드는 활자주조 수량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3,500자 정도나 되었다.

또 종전에는 밀(蜜)을 써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썼으나, 세종 때부터는 식자판(植字版)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효율을 올리게 되고 인쇄 효과도 훨씬 선명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가장 큰 인쇄소는 교서관이었는데, 이곳에서는 140여 명의 인쇄공이 소속되어 당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지방에서도 감영이나 사찰,향교 등에서 목판 인쇄에 따른 출판 활동이 활발했고, 개인도 목판으로 문집을 찍어내는 예가 허다하였다. 조선 초기의 교육 수준이 높고 향촌에까지 서적이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출판·인쇄 기술의 발달이 큰 요인이 되었다.

세종 때 학자 [변계량](卞季良)이 쓴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 라고 한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조선 초기 출판문화의 높은 수준을 말해 준다. 조선의 인쇄 기술은 일본·중국 등 이웃나라의 인쇄 기술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천문학편집

조선은 농업 사회였으므로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天文)·기상(氣象)·역법(曆法)을 중심한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세종은 과학에 조예가 깊어 측우기(測雨器)·대간의소간의(大小簡儀, 천문관측기)·혼천의(渾天儀, 천구의)·앙부일구(해시계)·자격루(自擊漏,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측우기의 발명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그 뒤 세조는 지리(地理) 측량기인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만들기도 하였다.

천문학농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만, 정치 질서를 하늘의 이치와 관련시켜 보기도 하여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재상이 천문학을 관장하는 관상감(觀象監)의 최고자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에 대한 관측을 위해 세종 때 경복궁 안에 간의대(簡儀臺)라는 천문대를 설치하고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비치·운영했으며, 삼각산·금강산·마니산·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지에도 천문학자를 파견하여 때때로 북극의 높이와 일식·월식 등 천체운행을 관측했다.

이 밖에 세종 때에는 앙부일구(해시계)·일성정시의[1]·자격루(물시계) 등 여러 시계를 만들어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렸으며, 보루각(報漏閣)을 궁 안에 설치하고 자격루를 비치하여 궁중에 시간을 알렸다(세종 16년).

또 1438년(세종 20년)에는 천민기술자들을 시켜 옥루기륜(물시계)을 만들어 궁 안의 흠경각(欽敬閣)에 설치했는데, 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다.

조선 초기 천문학의 성과 중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칠정산(七政算)》이라는 한국 독자적인 달력을 만든 것이다. 이 달력은 1442년(세종 24년)에 집현전과 서운관 학자들이 왕명으로 한국 역대의 역법(曆法)을 종합 정리한 기초 위에 원·명의 역법을 참작하여 만든 것으로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었다. 내편은 북경(北京)을 기준으로 한 중국과 달리 서울을 표준으로 작성한 달력으로서 해와 달 그리고 행성(行星)들이 운행하는 원리와 위치, 시각 등이 오늘날의 달력과 거의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고, 서울 지방의 밤과 낮의 길이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외편은 우리가 쓰기 위한 달력이 아니라, 이슬람력(회회력)을 이해하기 위해 개정·증보하여 번역해 놓은 것이다.

이 밖에도 농사 진흥과 관련하여 여러 천문서가 더 편찬되었고, 가끔씩 기상변화를 기록하여 놓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날짜별로 그 날의 일기·달무리·해무리·혜성·지진 등 자연변화에 관한 사항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천문·기상학에 관한 위정자의 관심과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의학편집

의학도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이 방면의 성과 중에서 특히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동의보감》 등은 조선시대 의학의 우수한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명저들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유명한 의사·의학자도 많이 배출되었다.

의학은 역학(譯學)과 더불어 국가에서 장려한 잡학의 하나였으며, 실제로 총명한 학도 중에서 의학을 하는 이가 많았다. 왕실과 국민보건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컸었다.

먼저 약재에 대한 이론서로는 1428년(세종 10년)에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편찬하여 한국에서 생산되는 수백 종의 약재를 소개했으며, 1433년(세종 15년)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노중례(盧仲禮) 등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85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7백여 종의 국산 약재를 소개하고, 1천 종에 가까운 병증에 대한 치료·예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1445년(세종 27년)에는 동양의학에 관한 서적과 이론을 집대성한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365권)가 전순의(全循義) 등이 편찬하였다.

이 책에는 153종 내외의 의학책들이 부문별로 망라되어 있는데, 이렇게 방대한 의학백과사전이 편찬된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다.

17세기 초 광해군에 편찬된 《동의보감》은 이러한 축적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의학의 발달은 특히 박물학 및 도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어 조선 초기 이 방면의 이해 수준이 높았음을 아울러 보여준다.

무기 개발·병법편집

조선 초기에는 한국의 지세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고 역대의 전쟁사를 정리하여 각종 병서(兵書)가 편찬되었다. 태조 때 정도전은 앞선 시기의 병서를 참고해 독자적인 《진법서(陣法書)》를 편찬하였다.

그 뒤, 문종 때에는 김종서(金宗瑞)의 주도하에 고조선에서 고려 말에 이르는 전쟁사를 정리하여 《동국병감(東國兵鑑)》(2권)이 편찬되고, 이어 고대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기간의 주요 전투를 전략적인 측면에서 정리한 《역대병요》도 간행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진법(陣法)》이 편찬되어 오위제에 기초한 군사훈련방법과 진(陣)을 치는 방법이 정리되었다.

이 책은 정도전의 진법서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병장도설(兵將圖說)》이라고 이름을 고쳐 이용되었다. 한편, 화기 제작과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 세종 때 편찬되기도 하였다. 무기는 군기감에서 주로 제작하였으나, 지방 군현에서도 제작하는 일이 많았다. 고려 말 최무선이 창안한 화약 무기는 조선 초기에 더욱 개량되어 그 성능이 두 배 이상 높아졌다.

임진왜란 전후편집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일반적으로 문화가 침체되어 있었으나, 이 가운데서도 무기의 발달을 보게 되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화차(火車)·거북선 등이 만들어졌으며,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무기인 조총(鳥銃)과 명군(明軍)의 불랑기(佛狼機)라는 서양식 대포도 모조(模造)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데도 상당한 기술의 향상이 있었다. 특히 거북선은 초기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보이나 실제 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은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직전에 완성한 거북선이다.

조선 후기편집

조선 후기에는 그동안 축적된 전통과학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서 들여 온 서양과학·기술을 수용하여 한 단계 높은 과학이론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조선 후기의 경제발전과 국력신장은 여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당시 중국에 들어온 서양 문물이 북경에 보내던 사신 등이 간접적으로 한국에 들여오게 되었다. 즉 선조 말년에 명나라에 갔던 사신이 구라파의 지도를 가져와서 처음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지리를 알게 되었으며, 1631년 인조 9년에는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에 갔다가 서양식 화포(火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과 서양의 과학서적 등을 가지고 돌아왔고, 1653년(효종 4년)에는 처음으로 청(淸)의 시헌력(時憲曆), 즉 서양의 역법(曆法)에 따른 태양력(太陽曆)을 한국에서도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 문물의 수입은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새로운 학풍을 고취하였다. 이익(李益)·안정복(安鼎福)·정약용(鄭若鏞) 등이 이 방면의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러한 학풍은 주자학이 끊임없는 사상통제(思想統制)를 함으로써 성장하지 못하였다.

의학편집

의학 분야에서는 광해군허준과 정작 등이 《동의보감》(1613년)을 펴내 한국뿐 아니라 중국 및 일본의 의학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수련 도교의 영향을 받아 예방의학에 중점을 두고 값싼 시골 약재를 사용한 치료방법을 개발한 것이 특색이다. 허준은 이 밖에도 《벽온신방(辟瘟新方)》(1612년)·《신찬벽온방》(1613년) 등을 저술하여 전염병 치료의 경험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허준과 같은 시기의 허임(許任)은 《침구경험방(針灸經驗方)》을 지어 침구술을 집대성하였으며, 그 뒤 박진희(朴震禧)·이헌길(李獻吉) 등은 마진(홍역)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키고, 정약용은 여러 마진에 관한 서적을 정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1798년)을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박제가 등과 더불어 종두법을 처음으로 연구·실험하였다. 이러한 의학전통은 고종 연간에 와서 더욱 발전되어 황필수(黃泌秀)의 《방약합편(邦藥合編)》,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과 같은 명저를 낳게 하였다. 특히 후자는 인체를 태양·태음·소양·소음으로 나누어 치료하는 독특한 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유명하다.

농업·어업·축산업편집

농업경영 및 농사기술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 방면의 저서가 다수 출간되었다. 1655년(효종 6년)에 나온 신속의 《농가집성》은 쌀농사 중심의 수전 농법을 소개한 것이다. 그 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원예작물을 비롯하여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농서의 출간이 요청되었다. 숙종 때 박세당의 《색경(穡經)》(1676년)과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영조 때 박지원의 《과농소초》, 그리고 정조 때 왕명으로 편찬한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 등은 새로운 농업경영에 바탕을 두고 편찬된 것이다.《색경》은 과수·축산·원예·수리·기후 등에 중점을 둔 것이고, 《산림경제》는 농업·임업·축산·양자·식품가공·저장 등 의·식·주 전반의 중요사항을 소개한 것이다. 《해동농서》는 한국 고유의 농학을 중심에 두고 중국 농학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한국 농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축산·어업과 관련하여 동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색경》과 《산림경제》 등에도 이에 관한 설명이 있다. 한편,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어 어류학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근해의 해산물 등을 직접 채집·조사하여 155종의 해산물에 대한 명칭·분포·형태·습성 등을 기록한 것이다.

천문학편집

천문학 분야에서도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천리경(망원경)을 비롯한 천문기구가 들어오고, 서양역법이 전래되면서 한국 천문학 발달에 큰 자극을 주었다. 효종 때 김상범(金尙範)은 김육의 도움으로 서양역법을 배워 《시헌력(時憲曆)》을 만들었으며, 그 후 한국 사정에 맞는 역법이 계속 연구되어 마침내 《천세력(千歲歷)》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헌종 때 남병길(南秉吉)은 역산서(曆算書)를 정리하여 《시헌기요(時憲紀要)》를 편찬했다.

이미 17세기 초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일식·월식·벼락·조수의 간만 등에 관하여 소개한 일이 있고, 17세기 말(숙종 대) 김석문(金錫文)은 처음으로 지구가 1년에 366회씩 자전한다고 주장하여 천동설을 부정하였다. 그 후 18세기에는 이익·홍대용 등이 나와 서양과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가졌다. 이익은 “만약 공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서양 천문학을 기준으로 할 것”이라고 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면 중국이 한가운데 있을 수는 없고 어느 나라든 세계의 중앙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홍대용은 지구자전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중심으로 우주를 해석하려는 입장에서 벗어나, 동물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지구에서만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천체에도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다.

기계편집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정약용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이용감(利用監)이라는 관청을 두자고까지 제안하였다. 그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사회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어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였다. 특히 정조가 청으로부터 5천여 권의 《고금도서집성》을 사들여 오자 그 속에 실린 테렝 장(Terreng Jean)[2]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거중기 등 건축기계를 제작하고, 한강에 가설한 배다리(舟橋)도 설계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정조가 화성(지금의 수원)을 축조하고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과학기술로는 이 밖에도 인조 때 정두원(鄭斗源)이 명에서 가져온 화포(총)와 자명종(시계) 등이 있으며, 인조 때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3]와 효종 때 표착한 하멜(Hamel) 일행은 한국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서양식 대포를 만드는 기술을 전해 주었다.

수학편집

조선 후기에 수학도 일정하게 발전하였다. 서양의 수학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기하학과 대수학 등 서양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나타났다. 17세기 말 최석정(崔錫鼎)은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수학책을 써서 무한대와 무한소의 수학적 개념을 해명하였으며, 대수·기하 및 삼각과 관련된 실학적 문제들을 풀어냈다. 홍대용도 서양 과학의 본질은 실험기구와 수학에 있다고 생각하여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책을 썼다.

조선 후기의 기술 발전은 주로 농업 및 의학과 관련된 분야에 집중되고, 교통·통신 그리고 제조업이나 산업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 이것이 서양에 비해 산업 혁명이 뒤지게 된 근본 이유다.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과 발전이 18세기까지만 해도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나, 19세기 정체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 과학이 천주교와 더불어 전래되어 천주교 억압이 과학에 대한 관심을 냉각시켰기 때문이었다.

함께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낮에는 해, 밤에는 별로 시간을 알 수 있는 기기
  2. 등옥함(鄧玉涵)
  3. 박연(朴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