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백자

도자기의 한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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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백자(韓國白磁) 또는 조선 백자(朝鮮白磁)는 고려 말기에 송나라 정요(定窯)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의 사진

고려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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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에 백자는 고려청자에 압도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는데, 대개 소문(素文)[1]·음각·양각·상감의 4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현재 고려 백자 몇 개가 박물관이나 개인의 소장으로 전하고 있는데 빛깔은 백색·유백색·대황유백색(帶黃乳白色)·담청색·담감람색(淡橄欖色) 등이 있다.

태토(胎土)는 흰색의 고령토이며 기벽(器壁)이 엷고 고대(高臺) 바닥에는 시유(施釉)하지 않은 것이며 기형이나 무늬에 있어서도 송(宋)·원(元)의 백자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말기에 와서는 기벽이 두꺼워지고 유약의 빛깔도 송의 정요풍(定窯風)을 닮은 독특한 백색으로 바뀌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인다. 시문(施紋)에 있어서는 음각·양각뿐만 아니라 흑토(黑土)나 진사(辰砂)로 상감한 것이 있고 기형은 수병(水甁)·완·합자(合子)·유호(油壺)·향로 등 여러 종류로 나뉜다.

백자상감 유로모란문매병은 고려시대 백자로서는 희귀한 양식을 보이는데 기복에 청자태토로 긴 능화형(菱花形)을 세로로 상감하고 그 안에는 흑·백·진사를 상감했다. (덕수궁미술관 소장)

조선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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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이르러서는 명나라 백자의 영향과 흰 것을 사랑하고 숭상하던 일반적 풍조에 따라 초기부터 후기 전반까지 꾸준히 발전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고려에서 시작된 화문 자기(花文磁器)[2]에 눌려서 주류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용재총화》에도 나오듯이 당시 백자는 진귀품으로 궁중에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에 자기소(磁器所)가 136군데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백자가 기술적으로 완성된 것은 이 시기로 추측된다.[모호한 표현]. 같은 기록에 도기소(陶器所)는 185군데라고 하였다. 세조 때에는 청료(靑料)[3]의 수입(輸入)이 어려우므로 백자는 주기(酒器)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예종(睿宗) 때에는 한국에서도 청료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한다. 이후 전국적으로 그 제조가 성행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위축되어 버리고,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백자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조선 백자는 화문 자기풍으로 변하여 근대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백자는 완벽을 자랑하는 중국 백자와는 달리 대청색(帶靑色)·대회백색(帶灰白色)·유백색(乳白色)의 것으로 그 색체에서도 특색을 지님은 물론, 기교면에서도 번잡에서 초탈(超脫)한 소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정적(靜寂)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고려 백자에 비해 정련(精鍊)된 기묘한 멋은 없다고 하나 조대호방(粗大豪放)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청화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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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는 조선시대 후기 청화백자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백자기이다. 태토 위에 청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철분이 섞인 장석유를 덮어 구은 것으로 중국에서는 유이청, 청화백자, 일본에서는 소메스키 라고 부르고 있고,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는 청화백자, 청화사기, 화기, 화자기 등으로 나와 있다. 청화백자가 생산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세조 10년(1465)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이 때에 순천에서 국산 안료인 토청이 채취되어 그것으로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청화백자의 발생시기는 15세기 중엽으로 보게 되는데 그 생산의 중심인 광주관요의 변천을 기초로 초기, 중기, 후기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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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물(器物)의 종류에는 병·호(壺)·발(鉢)[4]·주발·주전자·베개(枕)·향로(香爐)·화분대(花盆臺)·필통(筆筒)·연적(硯滴)·기타 문방구 등이 있다. 현재 국보, 보물로 지정되어 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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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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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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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늬가 없는 것
  2. 삼도수(三島手)
  3. 코발트청. 자료(磁料), 즉 도자기용 안료(顔料)의 일종
  4. 분(盆)이라고도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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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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