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존왕양이(일본어: 尊王攘夷)는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유래편집

  이 문단의 내용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8월 9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존왕론양이론이 결합된 에도 막부 말기 미토가쿠의 사상으로, 후지타 도코(일본어: 藤田東湖), 아이자와 야스시(일본어: 会沢安) 등이 중심이 되었다. 고대 중국춘추시대서주 왕조의 천자(天子)를 세우고, 영내에 침입하는 이민족(남방의 초나라가 대표)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춘추시대 패자들이 이용한 표어를 한국과 일본에서 차용했다.

한국편집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고종 때에 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쇄국 정치를 하면서 외척 안동 김씨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존왕양이를 높이 부르짖다가 병인양요신미양요 때 프랑스 및 미국 군대와 충돌하기까지 했다.

일본편집

일본은 메이지 유신 당시까지만 해도 막부에서 쇼군이 일본을 사실상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1854년 미국의 대포 앞에 굴복하여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자 쇼군의 무력함을 본 하급 사무라이 계층이 존왕양이의 명분을 내세우며 테러 형태로 서양 세력에 저항했다. 존왕양이의 중심은 사쓰마 조슈 번이었다. 사쓰마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1863년 완패했고, 조슈 역시 같은 해에 시모노세키에서 외국 군함을 포격했다가 다음 해인 1864년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고 여지없이 패했다. 조슈의 경우에는 영국에서 유학하던 이오누에 가오루이토 히로부미가 재빨리 돌아와서 번의 입장을 바꾸었다. 존왕양이론이 가장 강경했던 사쓰마와 조슈가 서양의 무력을 감지하고 재빨리 양이를 개국(開國)으로 전향하지 않았다면 서양 강대국들이 무력으로 일본의 양이론을 쳐부수고 군사적으로 일본을 점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항상 전쟁에 패하면 전술적으로 재빨리 전환하고 변신하는데, 그러한 성향이 일본을 지켰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하면, 일본 근대사에서 존왕양이는 오랑캐와 교섭할 뿐만 아니라 문명개화로 이어지고 민권론으로까지 이어진다. 초기의 사족민권론은 양이론의 연속으로 히라타 국학 같은 것을 진심으로 믿는 활동가들이 섞인 중에 1877년 세이난 전쟁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양이론을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막부를 타도하려고 했다. 결국 존왕양이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 되어 에도 막부의 통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세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애초 내걸었던 존왕양이의 두 가지 명분 중 양이는 슬그머니 포기한 채 오히려 서구화 내지 근대화를 앞당기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기에 이른다.[1]

같이 보기편집

참고문헌편집

각주편집

  1. 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18년(8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