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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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편집동향인 장굉, 진단과 함께, 손책을 모셔 장소와 함께 그 모주가 되었다.[1][2] 손책이 오군에 있을 때 장소, 장굉과 함께 손책의 상빈으로써 함께 마땅히 무력으로써 사해를 다스려 평정해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가, 당시 어려 말석에 앉은 육적에게 질책을 받았다.[3]
건안 7년(202년), 조조가 손권에게 임자(지방관의 아들을 서울에서 일하게 하는 것, 혹은 그 아들)를 요구하자 손권은 신하들과 회의를 열었는데, 진송은 장소 등과 함께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손권의 속마음과 주유의 주장이 일치하여 손권은 임자를 보내지 않았다.[4]
요절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