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원(崔明遠: 생몰년 미상)은 조선 중기의 처사이다. 본관은 화순, 는 가이(可邇)이다. 성운의 문인이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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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최흥림(崔興霖: 1506년~1581년 8월 13일(음력 7월 15일))이다. 을사사화가 일어난 후로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충청북도 보은군금적산에 은거하면서 학문 활동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1] 성운, 조식, 성제원 등과 교유했다.[2] 어머니는 평강 채씨로, 주부(主簿) 채치정(蔡致禎)의 딸이다.[3]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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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4]

아버지를 20년 동안 물심양면으로 극진히 봉양했다.[4]

형 최지원(崔知遠)을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형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폈다.[4]

아버지의 지시로 성운 밑에서 배웠다.[2]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하며 살았다.[5] 향년은 마흔이었다.[4]

아내는 신평 이씨로 슬하에 1남 1녀를, 측실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다.[4]

전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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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헌, 《청음집》 권34, 최 군 가이 묘지명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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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두천(崔斗天)(최흥림의 현손), 〈가장(家狀)〉(《계당유고》에 수록됨)
  2. 김원행, 《미호집》 권18, 溪堂處士崔公墓表
  3. 송환기, 《성담집》 권22, 溪堂處士崔公墓誌銘
  4. 김상헌, 《청음집》 권 34, 최 군 가이 묘지명
  5. "君本無求於世。世亦無知君者。故終於埋沒不聞。"(김상헌, 《청음집》 권 34, 崔君可邇墓誌銘)이라는 진술은 이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