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박서

마지막 의견: 5년 전 (전언겸님) - 주제: 답변

박문성에 대하여 편집

  1. 고려사 열전에는 박문성이 아니라 박서로 표기되어 있는점.
  2. 박서가 박문성으로 개명했다는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점.
  3. 박서의 아버지 박인석의 묘지명에도 막내 서라고 분명하게 명시하였다는 점.
  4. 박문성이 박서일 것이라는 주장은 인터넷상에서 오직 한 사람(대하사극 매니아 카페 회원)만이 주장하고 있다는 점. 이 분이 주장하는 바 중 하나는 귀주성 전투 공훈에 박문성이 있는데 박서가 들어있지 않기에 박문성이 박서로 개명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박서는 공훈은 커녕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는 상황을 같이 두고 생각한다면 고려조정에서 공훈을 사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박문창이 항복을 권유하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박문성 역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김중구 묘비명에 따르면 김중구가 사망한 1242년쯤에 이미 박문성은 평장사인데 종2품인 문하평장사가 죽었는데, 혹은 그전에 사망하였다 하더라도 1234년에 정3품인데 사망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도리어 사망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귀주성 전투 이후 정치적으로 숙청당하여 어려운 삶을 살다가 문하평장사는 추후에 현손인 박혁충대에 추증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죽산박씨충질공파세보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5. 불확실한 정보가 위키백과 출처라는 표기와 함께 사실인양 널리 퍼지고 있다는 점.
  6.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이름인 박서를 사용 하는 것이 좋아보인다는 점.

등에 따라 저는 박문성으로의 표기를 반대하고 박서의 표기로 고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Clanp (토론) 2018년 5월 1일 (화) 01:49 (KST) Clanp (토론) 2018년 5월 1일 (화) 01:49 (KST)답변

답변 편집

제가 그 카페에서 활동하는 회원입니다.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동문선』에 박문성(朴文成)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이자성(李子晟)·송순(宋恂)을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한다는 내용의 마제(麻制)가 실려 있습니다. 따라서, 박문성의 평장사 직함은 절대로 증직이 아닙니다.
  2. 저는 박서가 조정의 명으로 항복한 1232년(고종 19) 이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박인석 묘지명』(1212년 작성)에서 이름이 박서로 기록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정2품 평장사를 지냈던 인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려사』에 사망 기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박문성과 동시대의 인물만 봐도 김중귀·임경숙이 그렇습니다.
  4. 앞서 이야기한 마제에서 박문성에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을 보면 박서의 그것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재기용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요.
  5. 박문성의 아들인 박이온(朴李溫)의 묘지명(1272년 작성)이 현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문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요. --全彦謙 (토론) 2018년 7월 28일 (토) 23:13 (KST)답변
=박문성은 박서가 될수없습니다== 편집

++죽산박씨 족보, 음성박씨 족보 어디에도 박서가 박문성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없슴 ++몽고의 1차칩입때 귀주성에서 승전한 박서장군의 이름을 개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1232년에 죽주로 낙향한 이후,박서장군에대한 기록 없슴 박서장군의 행적이 1232년 이후 전혀 없는것으로 볼때 고향인 죽산으로 낙향했다가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분묘도 실전되어없슴 ++1232년몽고의 2치침입 용인에서 몽고장수 살레탑 김윤후에게 사살됨 ++1236년 몽고의 3차침입때는 죽주방호별감인 송문주장군이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첬습니다. 당시 박서장군이 죽주로 낙향하여, 만약 살아계셨다면,귀주성에서 승전한 대장군 박서 이름이 몽고의 2차, 3차 침입때 몽고와 관련된 참전 기록이 남아있어야합니다. 현재 죽주산성에 박서장군과 관련된 이야기 단, 한단어도 없습니다. 송문주장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장군 휘하에있던 부하입니다. ++몽고가 고려에서 완전히 떠나기전에는 박서장군 공적에대한 어떤 포상도 할수없었을것입니다. 몽고의 침입과 간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왕명과 몽고의 항복을 거부한 박서장군에게 문하시랑평장사라는 벼슬과 음성을 식읍으로 하는 본관 분적의 윤허를 당시 고종 왕이 내렸다고 볼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서장군의 공적은 몽고가 완전히 물러간 충선왕때 문하시링평장사로 추증되었다고보는것이 맞을것입니다.

 충선왕(재위 1308~1313) 

죽산박씨 충질공파 세보에 의하면 60년이지난 충선왕때 이르러 후손 혁충이 조정에 "박서"의 행장(行狀)과 사적(事蹟)을 갖추어 조정에 제출하여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자 서가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고 철성백(鐵城伯)에 추봉되었으며, 혁충에게도 철성(鐵城)을 세습(世襲)하게 하여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게 되자 후손들이 서(犀)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고합니다. ++박서장군이 박문성이라는 기록은 죽산박씨, 음성박씨,고성박씨 세보 어디에도 없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없습니다. ++박서장군의 이름을 박문성으로 개명할 이유가 없으며, 정확히 확증된 史料없이 박서장군이, 박문성이라고 확정하는것은 역사를 왜곡하고, 박서장군에대한 명예를 훼손하는일이며, 또한 죽산박씨,음성박씨, 고성박씨 문중에 悖逆하는 행위로 삼가해주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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