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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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위]] : 서울의 성곽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 것인지 밖으로 둘 것인지를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4,00040000,11 선바위], 문화재청</ref>
 
[[조선 영조]] 24년(1748)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장지(葬地)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공민왕]] 9년(1360) 부친이 사망하자 이성계는[[이성계]]는 명당을[[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師弟)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에[[명당]]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한 것 같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정정해 주었다. 가동(하인)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절히 청해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이야기다. <ref name="나옹제자무학">{{뉴스 인용|url=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8521|제목=21세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이름=이덕일 칼럼|작성일자=2010-08-22|출판사=중앙SUNDAY|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혜근|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無學)이라는 것이다. 부친 장지에 관한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만 25세 때부터 개국을 꿈꾸었다는 뜻이 된다. <ref name="나옹제자무학"/><ref>{{뉴스 인용|url=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29351|제목=천보산과 회암사(檜巖寺)의 국사 무학대사|이름=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작성일자=2012-12-03|출판사=경기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