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재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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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계획 ==
원래 왕재산 사건은 '북한 225국(옛 노동당 대외연락부)의 국내 지하당' 조직의 총 책임하에 [[1993년]] 8월에 김일성에게 수도권에 지역지도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아무개씨가 지인들을 포섭한 이후 [[2001년]] 3월에 '왕재산'이라는 이름으로 지하조직을 구축했다. 이후 왕재산은 [[2014년]]에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인천 남동공업단지 등을 폭파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유사시에 인천광역시의 행정기관, 군부대, 방송국 등을 장악한 이후 수도권에 대한 시위 형태의 공격작전 및 궐기대회를 실시할 예정이였으나 이 모든 계획이 [[2011년]]에 적발되는 바람에 이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10825005299&subctg1=&subctg2= 간첩단 ‘왕재산’ 사건 4명 구속기소]《세계일보》(2011.8.25)</ref>
 
== 관련 사항 ==
* 왕재산 사건 재판 과정에 자문 교수로 참여하였던 오길영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컴퓨터 포렌식|디지털 포렌식]] 측면에서 검찰이 제시한 디지털 증거에 대한 문제가 많으며, 디지털 증거의 증거 능력에 대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169 당신을 간첩 만들지 모를 지문없는 하드디스크]</ref>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