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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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광록대부 곽영이 “오랑캐가 예의에 벗어나는 것은 신하가 처리 할 일입니다. 천균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 쏘지 않는 법인데, 어찌 몸소 천자의 지위를 욕되게 하면서 작은 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하고 간하였으나 제가 듣지 않았다.
24년 봄 정월, 수 나라 양광이 다시 전국 군사들을 탁군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광이 근신들에게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국력이 바다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좌광록 대부 곽 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양광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양광은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 술과 양 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고, 왕 인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인공의 강병 1천여 명에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광이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운제·지도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 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 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 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 보며 우리 군사와 단병으로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광이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 대부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양광은 1백여 만 개의 푸대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푸대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뚝길을 쌓게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높이가 성보다 훨씬 높은 팔륜누거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뚝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수 나라에서 양 현감이 반역하였다는 보고가 오자, 양광은 크게 두려워 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현감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 때 수 나라 병부 시랑 곡 사정이 본래부터 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해왔다. 양광은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후퇴를 명하였다. 군수 기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오히려 수 나라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9십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 군사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여름 4월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신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 수만명이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날랜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우리 군사를 깨뜨렸으므로, 우리 군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비루(飛樓)·동차(?車)·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우리는 임기응변으로 막았으므로 20여일 동안 함락되지 않고, 적과 아군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의 장대의 길이가 15길이었는데, 심광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며 우리 군사와 싸우는데 칼을 가지고 십수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는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그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거기에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