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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 모문룡은 [[항저우]]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젊었을 때는 한 때 점장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북쪽의 [[산해관]]으로 가서, 약 [[1600년]]경에 입대를 하였다.
 
[[1621년]] 3월 [[심양]]과 [[요양]]이 [[누르하치]]에 의해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 모문룡은 요동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장담을 했으나, [[후금]]의 대병력이 내려오자 한달을한 달을 버티지 못하였다. 7월 모문룡은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곳에 상륙했다. 평안감사는 장계를 [[광해군]]에게 장계를 올려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어 그는 [[철산]], [[용천]], [[의주]] 등을 돌아다니면서 명의 패잔병과 난민을 수습했다.<ref name=pressian>{{웹 인용|url=http://keyword.pressian.com/articleK.asp?guide_idx=4141|제목=후금의 건국과 조선의 대응|확인일자=|저자=이윤섭|작성일자=2009-8-15|출판사=프레시안|원본일자=|인용=}}</ref>
 
모문룡이 명나라의 우방인 [[조선]]을 후금을 공략하는 기지로 삼은 것도 모문룡의 잘못이기도 했다. 모문룡의 조선 주둔은 후금을 크게 자극했다. 요양함락요양 함락 이래 한인들의 반란과 도망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대부분 모문룡과 밀통하거나 사주를 받아서 발생한 것들이었다.<ref name=pressian /> 그 결과 조선은 청나라에 침입을 받게 되었으며,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침입하자, 그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1621년]] 후금의 아민(阿敏)은 모문룡을 치기 위해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후금군은 의주, 가산, 용천 등지를 습격했고, 모문룡은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을 하고서 도망쳤다. 이 기습으로 유민 578명이 죽었다.<ref name=pressian />
 
[[1622년]] [[광해군]] 14년 모문룡은 광해군의 권유대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 (철산군)|가도]](椵島 또는 皮島)에 주둔했으며, 명군과 난민 1만여명이1만여 명이 이곳에 머물렀다.<ref name=pressian /> 부족한 식량은 조선에 군량을 강요해 징수를 했고, 명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이때 징수한 서량(西糧)은 모문룡이 철수한 뒤에도 계속 징수되다가 [[1648년]] 인조 22년에야 폐지가 되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A01&moId=040&daId=030&gaLid=023&gaId=&yoId=&ilId=&leId=&NodeId=ms_A001&setid=1797539&Pos=0&TotalCount=18&vipyunid=undefined 승정원일기, 1623년 4월 3일]</ref>
 
[[1622년]] 10월 이러한 공으로 총병을 제수받았다. 또한 [[1629년]]에는 좌도독이 되었다. 전략적인 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요 도시들을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베이징 지역에 있는 상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게다가 모문룡은 [[위충현]] 등 많은 [[환관]]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관리들을 부패하게 했다. 그리하여 [[원숭환]]은 가장 부패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이끌고 싸워야 했다. 모문룡은 피도(皮島, 또는 가도)<ref>조선왕조실록에는 가도(椵島)로 되어 있으며, 피도 또는 직도(㮨島)라고 부르며, 모문룡은 운종도(雲從島)로 부른다고 밝히고 있다. 광해군일기, 183권 1622년 11월 11일</ref>를 근거지로 해군을 이끌고 밀수를 하였지만, 명나라 북부의 경제에 많은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