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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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zh-cp|c=鮮卑|p=Xianbei}}, [[기원전 1세기]] ~ [[6세기]])는 하북성(헤베이성)에서 규합된 혼혈 유목 민족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남하하여 [[중국]]에 [[북위 (북조)|북위]] 등의 나라를 세웠다.
[[전한]] 시대동안 [[한무제]]가 [[위청 (장군)|위청]]을 보내 [[허타오]]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선비족은 기원전 시기에는 [[대흥안령산맥]] 기슭에서 목축, 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흉노에 복속했었다. 그 후 흉노가 북과 남으로 분열하자 전한에도 결합되는 부족이 나와 반독립상태가 되었다. 1세기가 되자 북흉노가 후한과의 항쟁을 계속하는 사이에 힘을 모아 북흉노를 몽골고원으로부터 서쪽으로 내쫓았다. 2세기 반경 단석괴({{lang|zh|壇石槐}})가 등장하여 부족의 통합에 성공하여 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석괴의 사후 다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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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은 투르크(돌궐)가 지휘하는 유목 민족으로 그 휘하 부대에 [[갈족]], 몽골로이드 계통의 유목 민족 [[동호]]가 있었다. 흉노 유골을 조사해보니 투르크와 몽골로이드 유골이 함께 나왔는데 인종적으로 차이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서 살았으므로 어느 정도 혼합되었다. 흉노족이 한나라와 전쟁하는 과정에서 한족들을 인질로 데려가거나,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가 흉노족 제후로 봉해지기도 하여, 흉노족에는 한족도 섞여 있었다.
후한 시대,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하여 [[북흉노]]를 서아시아로 밀어낸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흉노는 와해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공조 관계를 갖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 시대가 시작되자, 이때부터 유목 민족이 남하하여 한족과 통합되는 과정이 있었다.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갈족]], [[말갈족]]도 하북성, 산동성 등으로
선비족은 삼국 시대 이후로 중국과 만주의 징겅다리 지역인 [[하북성]]에서 한족과 유민 민족이 결합한 민족을 말한다. 한족은 유민 민족으로 개량되었고, 유민 민족은 한족으로 개량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삼국시대, 5호 16국,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수나라 까지 계속되었다. 선비족은 영어로 치면 하이브리드(Hybrid)라는 단어로 정의되고 하북성, 요동 서부에 살던 민족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선비족은 [[흉노]], [[돌궐]], [[말갈]]과는 태생의 기반이 조금 다르고, 같은 선비족이라고 하더라도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선비족 출신인 당태종이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요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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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부족 선비족의 정체성이 강한 부족은 [[탁발부]], [[모용부]]이고, 단부, 우문부는 [[우환족|우환]]족에 가깝다. [[흘독부]], [[독발부]]은 본래 선비족에서 나왔다고 하며, [[남량]]이 망하고 북위에 귀속되었다.
이 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천한 [[토욕혼]]({{lang|zh|吐谷渾}})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강인({{lang|zh|羌人}})도
탁발부의 [[북위 (북조)|북위]]({{lang|zh|北魏}})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이 이후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그 후 수의 [[양견]]({{lang|zh|楊堅}})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되었으나 양견은 우문부가 세운 북주({{lang|zh|北周}})의 외척이고 자신도 선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동일하게 선비족시기 다얀씨(大野氏, 대야씨)인 [[북주]]({{lang|zh|北周}})의 귀족이었던 당의 [[당 고조|이연]]({{lang|zh|李淵}})도 또 선비 출신일 가능성이 주장되고 있다. 북위의 한족화 정책으로 선비족은 [[한족]]에 동화되었다.
선비족 가운데 요서 지역의 민족은 당나라 후기에는 거란이 되었고, 요나라를 세웠다. 이때 그 휘하에 있던 말갈족, 갈족들이 일부 동만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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