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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년|1401]])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년|1405]]).<ref name="글로벌-자초"/> 사망 후 [[조선 태종|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1&Num=48 회암사 무학대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ref>
 
== 전해오는 이야기전설(傳說) ==
무학은무학(無學)은 여러 [[야사]](野史)와 [[민담]](民譚)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왕십리동|왕십리]]의 유래: 무학대사가무학(無學)이 [[조선]]의 새[[수도|도읍]]을 정하러 돌아다니다가 왕십리에왕십리(往十里)에 이르러 이 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생각하는데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꼭 무학대사처럼무학(無學)처럼 바른 길로정도(正道)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라고 꾸짖어 서쪽으로 10서방으로 [[리]]를 더가더 가 [[경복궁]](景福宮)의 터를 정하였다는 이야기가전설(傳說)이 전한다있다.<ref>박건용, 《김소월의 시 〈왕십리〉 분석》, 투멘, 2010년, ISBN 9050067190, 49쪽</ref>
* [[선바위]] : 서울의 성곽을성곽(城郭)을 쌓을 때 정도전과정도전(鄭道傳)과 무학은무학(無學)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 것인지넣을지 밖으로 둘 것인지를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왔다가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전설이 전한다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4,00040000,11 선바위], 문화재청</ref>
 
[[조선 영조]] 24년(1748)재위 24년인 서기 1748년 [[함경도]](咸鏡道) 출신의 승지(承旨)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성계](李成桂)]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장지(葬地)에 관한 일화가일화(逸話)가 나온다. [[공민왕]] 9년(1360)재위 9년인 서기 1360년에 부친이 사망하자죽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師弟)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에 대해 대화를두고 나눈다대화한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고듯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자세(仔細)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한 것 같이긴요(緊要)하듯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정정해교정(矯正)해 주었다. 가동(하인家僮)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절히 청해간청(懇請)해 ‘왕이 날’ 장지를장지(葬地)를 얻었다는 이야기다전설(傳說)이다. <ref name="나옹제자무학">{{뉴스 인용|url=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8521|제목=21세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이름=이덕일 칼럼|작성일자=2010-08-22|출판사=중앙SUNDAY|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편찬한편찬(編纂)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보다전설이 자세한 이야기가자세(仔細)히 전한다기록됐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애걸(哀乞)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조짐(兆朕)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원(願)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혜근|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無學)이라는 것이다전설이다. 부친 장지에장지(葬地)를 관한다룬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면일화는 [[이성계]] 만 25세 때부터 개국을반역(叛逆)을 꿈꾸었다는 뜻이 된다전설(傳說)이다.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무학]](無學)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없지만 그가사람이 [[조선 태조|태조]]의 꿈을 풀어주면서풀어 주면서 왕이 될 운명이라고 이야기한 것이이야기가 두 사람이 급속도로급속도(急速度)로 가까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듯하다. [[조선 태조|태조]]가 고려말에고려 말에 [[홍건적]]과 왜구를왜구(倭寇)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날리던 중 어느날어느 날 밤 닭이 우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도 신기해서 친구인 [[무학대사무학]] 찾아가 꿈을 이야기했더니 [[무학대사무학]] 큰 절을 하며하면서 이제 왕이 되실것입니다라고되겠습니다라고 예언을 하였다는이유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데 꼬는 한자(漢子)로 고(高)이고 까는 한자로 귀(貴)이고 요는 한자로 위(位)인데 이 세 마디 말을 합치면 고귀위(高貴位)인데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바로 왕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성계(李成桂)는 이 꿈을 이용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결국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조선]]을 것이다세웠다.
 
이처럼 새로운 국가나라를 건설의세우는 원동력을 제공해준제공한 이가사람이 [[무학대사무학]]였고,이었고 그로 인하여말미암아 무학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무학은 단순히 국왕과왕과 가까운 권승(權僧)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아니라서인지 [[고려 충숙왕]](1328)[1328년]때 [[인도]]에서 [[원나라]](元)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스님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266칸 대규모규모 사찰로 중창하였던 [[회암사]](檜巖寺)지공과지공(指空)과 [[혜근|나옹]] 그리고 무학까지 고려말려말선초(麗末鮮初) 조선초기의 최고의최고 [[선승]]으로 모시고다루는데 있는데 이러한이런 [[무학대사무학]] [[선승]]으로써으로서 [[풍수지리]]에도 해밝아해박(該博)해 [[서울]] 도성의도성 위치를 잡은 것은설정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큰 스승이라는 의미의 대사(大師)로 불려지는 이유이다.<ref name="나옹제자무학"/><ref>{{뉴스 인용|url=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29351|제목=천보산과 회암사(檜巖寺)의 국사 무학대사|이름=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작성일자=2012-12-03|출판사=경기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그 이유인즉슨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데 꼬는 한자로 고(高)이고 까는 한자로 귀(貴)이고 요는 한자로 위(位)라는 것이다. 이 세말을 합치면 ‘고귀위(高貴位); 인데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바로 임금을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한 것 이다. 태조는 이꿈을 통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마침내 역성혁명을 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국가 건설의 원동력을 제공해준 이가 [[무학대사]]였고, 그로 인하여 무학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무학은 단순히 국왕과 가까운 권승(權僧)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고려 충숙왕]](1328)때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스님(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던 [[회암사]]는 지공과 [[혜근|나옹]] 그리고 무학까지 고려말 조선초기의 최고의 [[선승]]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러한 [[무학대사]]는 [[선승]]으로써 [[풍수지리]]에도 해밝아 [[서울]] 도성의 위치를 잡은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큰 스승이라는 의미의 대사(大師)로 불려지는 이유이다.<ref name="나옹제자무학"/><ref>{{뉴스 인용|url=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29351|제목=천보산과 회암사(檜巖寺)의 국사 무학대사|이름=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작성일자=2012-12-03|출판사=경기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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