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ieBot (토론 | 기여)
Abc (토론 | 기여)
9번째 줄:
그 다음 프리드리히는 국내 정책에 힘을 쏟아, 폴란드의 속국화나 오스트리아의 공국화, 보헤미아 왕국 설립, 숙적 하인리히 추방 등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또 [[시칠리아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어 남이탈리아에 군대를 보내지 않고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훗날 그의 아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 때 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할 수 있게 된다.
 
1189년,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예루살예루살렘]]렘을 해방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제3차 십자군]]의 총사령관으로 출정하였다. 다음해에 이코니움 전투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190년 6월, [[소아시아]] 남동부 킬리키아의 살레프 강에서 목욕하던 도중에 어이없게도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바깥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