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기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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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피에르 기욤 기조''' (François Pierre Guillaume Guizot, [[1787년]] [[10월 4일]] ~ [[1874년]] [[9월 12일]]) 는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다.
 
[[님 (도시)|님]]의 신교도 가정에서 출생하여 [[파리 (도시)|파리]]에서 [[법률]]을 배우고 뒤에 [[문학]]을 공부하였다. 1812년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를 번역하여 역사가로서 출발하였고, 그 해 소르본 대학 근세사 교수가 되었다. 왕정 복고 후에 내무성, 법무성에 근무하였다.
 
1842년 영국이 중국에서의 개입에 성공하자,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으로 접근함으로써 이러한 영국의 개입에 대응하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프랑스의 외무장관이던 1843년, 기조는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fr:Léonard Victor Charner|Léonard Charner]]) 대령의 지휘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다.<ref name="Chapuis"/>{{Rp|5}} 이것은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국 내에서의 영국의 활동을 돕고, 베트남 내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핑계를 내세웠다. <ref name="Tucker"/> {{Rp|27}} 외교관 테오도르 드 라그르네([[:fr:Théodore de Lagrené|Théodore de Lagrené]])도 동반한 이 함대는 [[홍콩]]과 유사한 기지를 만들기 위해 [[바실란 주|바실란(Basilan) 섬]]을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스페인]]이 이 섬은 필리핀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나서자, 정복 계획은 폐기되었다. <ref name="Chapuis"/> {{Rp|5}} 프랑수아 기조는 세실을 베트남으로 보내어 카톨릭 선교사인 도미니크 레페브르([[:en:Dominique Lefèbvre|Dominique Lefèbvre]]) 주교를 구출해 오도록 했다.(1845년) <ref name="Chapuis"/> {{R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