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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
1942년 6월, [[게슈타포]]의 아시아 지구 사령관으로 주일 독일 대사관 경찰 담당관을 맡고 있던 통칭 "[[바르샤바]]의 도살자" [[요제프 마이 징거]]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정부에 대해 상하이 유대 난민 "처리"를 강요하면서, 아래와 같은 세가지 안을 제시했다.
 
*황포강에 있는 폐선에 유대인을 태워 [[동중국해]]에 흘려보낸 뒤, 격침시켜 수장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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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쯔강 아랫쪽에 수용소를 세우고 유대인을 생체실험의 [[마루타]]로 쓴다.
 
요제프 마이 징거는 히틀러, 히믈러의 "최종해결책"의 아시아 버전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안은 야스에를 거쳐서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에게 전달되었으나, 정부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마이 징거의 계획은 이른바 "상하이 게토"을 형성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상하이 유대인은 게토 안에서 살 것을 강요당하고 주거이동의 자유가 금지되었다.
 
이후 전쟁 끝무렵까지 유대 난민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며, 유대인 지도자 가운데는 형무소에 보내진 사람도 있었다. 또, 많은 유대인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시내의 무선기 파괴를 목표로 하는 연합군 공격기에 의해 종전을 몇달 앞두고 게토가 폭격을 당하는등당하는 등 갖가지 시련을 겪었으나, 마침내 나치독일의 패망과 해방을 맞았다.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