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번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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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sup style="color: blue">209)</sup> 제7식과 제8식을 가리킨다."}}
 
《[[성유식론]]》 제4권에 따르면, [[염오식]](染汚識)으로서의 [[제7말나식]]이 [[상응 (심불상응행법)|상응]](相應)하는 4근본번뇌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아치]](我痴)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순서로 생겨난다.{{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4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16 216-217 / 583]. 4근본번뇌(四根本煩惱)|quote=<br>"이 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sup style="color: blue">202)</sup> 우선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한다. 여기서 ‘함께한다’는 말은 상응의 의미를 나타낸다. 아득한 옛적부터 아직 전의를 이루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이 말나식은 자연적으로 항상 장식을 반연하고, '''네 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울러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말한다. 이것을 네 가지 근본번뇌라고 이름한다. ‘아치(我痴)’는 무명을 말한다. 자아의 양상에 어리석어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다. 따라서 아치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3)</sup> ‘아견’은 아집을 말한다. 자아가 아닌 법에 대해서 망령되게 계탁하여 자아로 삼는다. 따라서 아견이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4)</sup> ‘아만’은 거만함을 말한다. 집착된 자아를 믿어서 심왕으로 하여금 높이 올린다. 따라서 아만이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5)</sup> ‘아애’는 아탐(我貪)을 말한다. 집착된
자아에 대해서 깊이 탐착(耽着)을 일으킨다. 따라서 아애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6)</sup>
(제5게송에서) ‘아울러[幷]’라고 말한 것은, 아만{{.cw}}아애가 아견{{.cw}}아만과 함께하는 일이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다른 부파가<sup style="color: blue">207)</sup> 상응하는 뜻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 네 가지가 항상 일어나서<sup style="color: blue">208)</sup> 안으로 심왕<sup style="color: blue">209)</sup>을 어지럽히고 혼탁하게 하며, 밖으로 전식(6식)을 항상 잡염되게 한다. 유정이 이것(번뇌)으로 인해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번뇌라고 이름한다.
<br><sup style="color: blue">203)</sup> 아치(我痴, ātmamoha)는 자기 본질의 이치[無我]를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 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 이런 입장에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痴)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하였다.
<br><sup style="color: blue">204)</sup> 아견(我見, ātmadṛṣṭi)은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으로서, 살가야견(薩迦耶見, satkāya-dṛṣṭi:有身見)이라고도 한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cw}}나의 소유[我所]로 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br><sup style="color: blue">205)</sup> 아만(我慢, ātmamāna)은 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cw}}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뜻하였다. 유가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으로 생각하였다.
<br><sup style="color: blue">206)</sup> 아애(我愛, ātmasneha)는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또한 죽음의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br><sup style="color: blue">207)</sup> 설일체유부를 가리킨다.
<br><sup style="color: blue">208)</sup> 아치(我痴)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아만→아애(我愛)의 순서로 생겨난다.
<br><sup style="color: blue">209)</sup> 제7식과 제8식을 가리킨다."}}
 
* '''아치'''(我癡)는 [[무명 (불교)|무명]](無明)을 말하는 것으로, [[제7말나식]]으로 하여금 [[아상]](我相) 즉 [[자아]][我, ātman]의 양상에 대해 어리석어 [[무아]](無我)의 이치에 대해 [[미혹]][迷]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loc=제4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22a28 T31n1585_p0022a28 - T31n1585_p0022a29]. 아치(我癡)|quote=<br>"我癡者謂無明。愚於我相迷無我理故名我癡。"}}{{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4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16 216 / 583]. 아치(我癡)|quote=<br>"‘아치(我痴)’는 무명을 말한다. 자아의 양상에 어리석어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다. 따라서 아치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3)</sup><br><sup style="color: blue">203)</sup> 아치(我痴, ātmamoha)는 자기 본질의 이치[無我]를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 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 이런 입장에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痴)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