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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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좌에 오른 후 제일 먼저 교황이 되기 위해 애를 썼던 카롤로 추기경을 제거함으로써 카라파 가문의 족벌주의를 단죄하였다.
 
비오 4세는 두 가지 면에서 뛰어난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다. 첫째는 조카였던 카롤로 보로메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국무성성 장관을 시켜 교회 쇄신을 추진한 점과 둘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여 종결 지은 것이다. 젊은 카롤로 보로메오를 국무성성 장관에 임명할 때 다소 잡음이 있었으나 사절들을 보내어 공의회를 움직이게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0년간 중단되었던 공의회를 [[1562]]년 1월 18일에 재개하여 1563년 12월 4일에 성공적으로 종결시켰다. 공의회가 끝난 뒤 비오 4세는 추기경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기구는 후에 교황청의 성성(''congregatio'')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종교 재판을 완화시키고 교황 자신은 [[이단 심문에심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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