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티액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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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스트리트는 자신의 승인되지 않은 외교가 상관의 분노를 샀다는 것을 모른 채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8월 26일]], 디트로이트 요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조약 협상을 벌였다. 브래드스트리트는 협상에 불참한 폰티액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오타와 족 지도자가 회의장에서 보낸 평화의 벨트를 산산조각 냈다. 사학자 리처드 화이트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유럽 대사가 제안한 조약에 오줌을 싸는 행위에 거의 같고, 참석한 인디언들에게 충격과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인디언들이 협상 결과, 영국의 주권을 인정했다고 주장했지만, 존슨은 인디언에게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서 추가 협의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지역의 영국군 요새를 강화하고, 재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외교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었다.<ref>For Bradstreet at Detroit, see White, ''Middle Ground'', 297–98; McConnell, ''A Country Between'', 199–200; Dixon, ''Never Come to Peace'', 227–32; Dowd, ''War under Heaven'', 153–62.</ref>
[[File:Bouquet captives.jpg|thumb|포로로 잡혀간 많은 아이들이 인디언 가정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벤자민 웨스트]]가 그린 그림과 같이 강제송환은 눈물의 이별이 되었다.]]
 
부켓 대령은 민병대를 모으기 위해 펜실베니아에서 지체되고 있었고, [[10월 3일]] 1,150명을 데리고 겨우 핏 요새를 출발했다. 부켓은 오하이오 카운티에서 머스킹엄 강까지 행군을 했고, 많은 인디언 마을을 타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진군했다. 나이아가라 요새와 디트로이트 요새에서 평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하이오 인디언 부족은 고립되어 있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 평화협정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0월 17일]] 시작된 협상에서 부켓은 오하이오 인디언 부족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부터 귀환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포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구야스타 등의 지도자들은 마지못해 200여명 포로를 반송했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인디언 가정에 입양된 이들이었다. 모든 포로가 반환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다른 포로가 귀환할 때까지 인질을 보내도록 강요받았다. 오하이오 인디언 부족은 윌리엄 존슨과 공식적인 추가 평화 협상의 자리에 앉을 것을 약속했고, 그것은 [[1765년]] 7월에 종결되었다.<ref>For Bouquet expedition, see Dixon, ''Never Come to Peace'', 233–41; McConnell, ''A Country Between'', 201–05; Dowd, ''War under Heaven'', 162–65.</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