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티액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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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
폰티액 전쟁의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투에서 약 4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전사했고, 50명 정도는 체포된 후 고문으로 죽었다.<ref>Peckham, ''Indian Uprising'', 239. Nester (''"Haughty Conquerors"'', 280) lists 500 killed, an apparent misprint since his source is Peckham.</ref> 조지 크로건은 2,000명의 정착민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된 것으로 간주했지만, 이 2,000명이라는 숫자가 사망자 수라는 자료도 있다.<ref>For works which report 2,000 killed (rather than killed and captured), see Jennings, ''Empire of Fortune'', 446; Nester, ''"Haughty Conquerors"'', vii, 172. Nester later (p. 279) revises this number down to about 450 killed. Dowd argues that Croghan's widely reported estimate "cannot be taken seriously" because it was a "wild guess" made while Croghan was far away in London; Dowd, ''War under Heaven'', 142.</ref> 이 폭동으로 약 4,000명의 정착민이 펜실베니아와 버지니아의 고향에서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ref>Dowd, ''War under Heaven'', 275.</ref> 인디언의 손실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지만, 200여명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피트 요새에 시도된 세균 무기가 성공하였다면, 사망자는 좀 더 늘어났을 지도 모른다.<ref>Nester, ''"Haughty Conquerors"'', 279.</ref>
 
폰티액 전쟁은 전통적으로 인디언 측의 패배로 간주되어 왔지만<ref>Peckham, ''Indian Uprising'', 322.</ref>, 현대의 학자들은 군사적 교착상태로 여기고 있다. 인디언은 영국군을 몰아내는데 실패했지만, 영국도 인디언을 정복하지 못했다. 전장에서의 승리가 아닌 협상과 중재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242–43; White, ''Middle Ground'', 289; McConnell, "Introduction", xv.</ref> 인디언은 영국 정부에 애머스트의 정책을 포기시켰고, 프랑스 - 인디언 동맹에서 정형화되었던 인디언 교류 방식을 답습하여 일종의 승리를 쟁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ref>White, ''Middle Ground'', 305–09; Calloway, ''Scratch of a Pen'', 76; Richter, ''Facing East'', 210.</ref>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