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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의 전쟁 ===
백제가 369년 마한을 정복하러 간 틈을 이용하여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렀는데 백제사람 사기가 고구려 군사의 기밀을 알려주자 쉽게 쳐서 깨뜨리고 수곡성까지 영토를 넖혔다. 근구수 태자가 추격하려는데 장군 막고해가 도가의 말을 인용하여 말리자 추격을 멈췄다.또,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포로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국원왕은 복수를 하기위해 371년에 군사를 일으켜 재침공하였다. 근초고왕은 패하(浿河)가에 군사를 매복시켜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근초고왕은 기세를 타서 겨울에겨울 10월에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함락하기 직전이었으나 흥분한 고구려군사의 결사항전이 심하여 물러났다. 고국원왕을 고국(故國)의 들(原)에 장사지냈다.
 
고국원왕 사후 소수림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전열을 재정비 하고 375년 7월에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이 반격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근초고왕은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1월 근초고왕이 승하하고 태자 근구수가 즉위하였다. 376년 11월에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 갔다. 377년 근구수왕은 고구려의 잦은 도발에 노하여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재침공 하였다. 그러나 전열이 갖춰진 고구려를 못이기고 패퇴하였다. 보복으로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이후 전면전 대신 양국의 도발행동이 이어졌다. 386년 새로 즉위한 진사왕이 고구려의 침략에 방비하자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387년 9월에 고구려가 말갈(靺鞨)을 이용하여 관미령(關彌嶺)으로 침공하여 승리하였다. 389년 9월에 진사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한편 고국원왕은 [[369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백제의 왕자 근구수(近仇首)에게 패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한 고국원왕은 패하(浿河)에서 복병을 만나 패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오니 고국원왕이 이를 막다가 활에 맞아 전사하였고 고국(故國)의 들(原)에 장사지냈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