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 오팔무집(五八無執). 유식종에서는 8식 중 경계에 대하여 허망 분별을 일으켜 아(我)다, 법(法)이다라고 집착하는 능변계(能遍計)의 뜻이 있는 것은 제6식과 제7식뿐이라고 하는 말. 제7식은 제8식의 견분(見分)을 반연하여 아집(我執)을 일으키고, 제6식은 온갖 법경(法境)에 대하여 아집ㆍ법집을 일으킴. 그러나 전5식과 제8식은 아집ㆍ법집이 없고 능변계하는 뜻도 없다 함. 이는 호법(護法)의 학설."}}
 
한편,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제7말나식]]도 [[계탁]]을 하지만, 두루 즉 항상 [[계탁]]하지는 않는다.{{sfn|운허|loc="[http://buddha.dongguk.edu/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9%81%8D%E8%A8%88&rowno=1 能遍計(능변계)]". 2013년 3월 2일에 확인}} 대신, [[제7말나식]]은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자신의 [[실아]]라고 여기는 [[근본 무명]]을 비롯한 [[4번뇌]]를 항상 일으킨다.{{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loc=제4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22a24 T31n1585_p0022a24 - T31n1585_p0022b06]. 4근본번뇌(四根本煩惱)|quote=<br>"此意相應有幾心所。且與'''四種煩惱'''常俱。此中俱言顯相應義。謂從無始至未轉依此意任運恒緣藏識與'''四根本煩惱'''相應。其四者何。謂我癡我見并我慢我愛。是名四種。我癡者謂無明。愚於我相迷無我理故名我癡。我見者謂我執。於非我法妄計為我。故名我見。我慢者謂倨傲。恃所執我令心高舉。故名我慢。我愛者謂我貪。於所執我深生耽著。故名我愛。并表慢愛有見慢俱。遮餘部執無相應義。此四常起擾濁內心令外轉識恒成雜染。有情由此生死輪迴不能出離。故名煩惱。"}}{{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4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16 216-217 / 583]. 4근본번뇌(四根本煩惱)|quote=<br>"이 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sup style="color: blue">202)</sup> 우선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한다. 여기서 ‘함께한다’는 말은 상응의 의미를 나타낸다. 아득한 옛적부터 아직 전의를 이루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이 말나식은 자연적으로 항상 장식을 반연하고, '''네 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울러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말한다. 이것을 네 가지 근본번뇌라고 이름한다. ‘아치(我痴)’는 무명을 말한다. 자아의 양상에 어리석어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다. 따라서 아치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3)</sup> ‘아견’은 아집을 말한다. 자아가 아닌 법에 대해서 망령되게 계탁하여 자아로 삼는다. 따라서 아견이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4)</sup> ‘아만’은 거만함을 말한다. 집착된 자아를 믿어서 심왕으로 하여금 높이 올린다. 따라서 아만이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5)</sup> ‘아애’는 아탐(我貪)을 말한다. 집착된
자아에 대해서 깊이 탐착(耽着)을 일으킨다. 따라서 아애라고 이름한다.<sup style="color: blue">206)</sup>
(제5게송에서) ‘아울러[幷]’라고 말한 것은, 아만{{.cw}}아애가 아견{{.cw}}아만과 함께하는 일이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다른 부파가<sup style="color: blue">207)</sup> 상응하는 뜻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 네 가지가 항상 일어나서<sup style="color: blue">208)</sup> 안으로 심왕<sup style="color: blue">209)</sup>을 어지럽히고 혼탁하게 하며, 밖으로 전식(6식)을 항상 잡염되게 한다. 유정이 이것(번뇌)으로 인해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번뇌라고 이름한다.
<br><sup style="color: blue">203)</sup> 아치(我痴, ātmamoha)는 자기 본질의 이치[無我]를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 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 이런 입장에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痴)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하였다.
<br><sup style="color: blue">204)</sup> 아견(我見, ātmadṛṣṭi)은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으로서, 살가야견(薩迦耶見, satkāya-dṛṣṭi:有身見)이라고도 한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cw}}나의 소유[我所]로 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br><sup style="color: blue">205)</sup> 아만(我慢, ātmamāna)은 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cw}}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뜻하였다. 유가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으로 생각하였다.
<br><sup style="color: blue">206)</sup> 아애(我愛, ātmasneha)는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또한 죽음의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br><sup style="color: blue">207)</sup> 설일체유부를 가리킨다.
<br><sup style="color: blue">208)</sup> 아치(我痴)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아만→아애(我愛)의 순서로 생겨난다.
<br><sup style="color: blue">209)</sup> 제7식과 제8식을 가리킨다."}}
 
변계(遍計)라는 낱말이 사용된 불교 용어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cw}}[[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cw}}[[능변계]](能遍計){{.cw}}[[소변계]](所遍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