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타 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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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타 칸'''(Тохтога, ? - [[1312년]])은 [[금장 한국]]의 칸이었다. 그는 [[만그 티무르]]의 아들이며 [[바투 칸]]의 증손이었다.
 
1288년, 토크타는 삼촌에 의해 밀려났다가 1291년 [[노가이 칸]]의 도움으로 제위를 다시 주장하였다. 토크타는 크리미아를 노가이에게 보답으로 주었다. 노가이는 툴라부가의 지지자였던 많는 몽골 귀족을 참수하였다.
곧 토크타와 노가이는 경쟁을 시작하였다. 토크타는 노가이의 영향력을 러시아에서 제거하기를 원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형제 듀덴(투단)을 1293년 러시아로 보냈는데 그의 군대는 14개의 마을과 토크타를 유린하였다. 결국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노가이의 동맹)를 양위케하였다. 러시아 사가는 이 사건을 바투의 귀환으로 적고있다.
결국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노가이의 동맹)를 양위케하였다. 러시아 사가는 이 사건을 바투의 귀환으로 적고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탈리아 상인과의 교역에 반대하였고 노가이의 반대에 불만을 말하였다. 칸의 군대는 1299년 노가이와의 첫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다행히도 노가이는 추격하지 않았다.
칸의 군대는 1299년 노가이와의 첫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다행히도 노가이는 추격하지 않았다.
 
1299년 노가이는 결국 카감릭 강의 전투에서 패하였다. 토크타 칸은 볼가에서 돈강사이의 땅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노가이의 아들 차카는 알란스로 달아났다가 [[불가리아]]로 들어가 그곳에서 황제로 군림하였다. 곧 토크타의 분노는 테오도르 스베토슬라브가 차카의 머리를 칸에게 보내게 하였다.
1299년 노가이는 결국 카감릭 강의 전투에서 패하였다.
토크타 칸은 볼가에서 돈강사이의 땅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노가이의 아들 차카는 알란스로 달아났다가 [[불가리아]]로 들어가 그곳에서 황제로 군림하였다.
곧 토크타의 분노는 테오도르 스베토슬라브가 차카의 머리를 칸에게 보내게 하였다.
 
그는 후계자가 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몇 무슬림 문헌은 그의 아들이 우즈베크의 지지자들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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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킵차크 한국]]
[[분류:생년 미상]]
[[분류:1312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