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69번째 줄:
<br><sup style="color: blue">36)</sup> 보광이나 법보 모두 이를 경부사의 해석으로 평석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살가야를 동격한정복합어(持業釋)로 해석하여 무상의 오취온이라 하였다. 따라서 살가야견은 비실재인 허위의 5취온에 대한 지식이다.(이 경우 壞身見·虛僞身見으로 번역됨), 이 때 견의 소연은 실재하지 않으며 단일하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견해 『대비바사론』 (권제8, 대정장27, p. 36상 ; 한글대장경118, p. 167) 상에서 비유자(譬喩者)의 주장으로 전해진다. "살가야견은 실재적인 대상[實所緣]을 갖지 않는다. 곧 살가야는 실재적인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주장이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아와 아소는 실재하지 않는다.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보고, 나무 그루터기를 사람 등으로 착각하듯이 이것 역시 실재적 대상을 갖지 않는 인식[見]인 것이다." 이에 반해 유부에 의하는 한 살가야견은 실재하는 오취온(즉 有身)에 대해 그것을 '아' 등의 단일한 실재로 파악하는 그릇된 지식이란 뜻이며, 그래서 보통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하는 것이다.(후술)
<br><sup style="color: blue">37)</sup> 『잡아함경』 권제2 제45경(대정장2, p. 11중), "만약 사문과 바라문이 자아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두 바로 이러한 5음(陰)에서 자아를 보는 것이다." 즉 아와 아소에 대한 주장을 일으키는 것은 뭔가 특별한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오온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
* [[허위]](虛偽) 또는 [[패괴]](敗壞) 즉 '거짓', '가설적인 것' 또는 '깨어지고 부서진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로, [[부파불교]]의 [[경량부]]의 견해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일부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는데, 예들 들어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에서는 [[패괴]]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sfn|안혜 조, 지바하라 한역|T.1613|loc=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13_p0852c23 T31n1613_p0852c23 - T31n1613_p0852c29]. 살가야견(薩迦耶見)|quote=<br />"云何薩迦耶見。謂於五取蘊。隨執為我。或為我所。染慧為性。薩謂敗壞義。迦耶謂和合積聚義。即於此中。見一見常。異蘊有我蘊。為我所等。何故復如是說。謂薩者破常想。迦耶破一想。無常積集。是中無我及我所故。染慧者。謂煩惱俱。一切見品所依為業。"}}{{sfn|안혜 지음, 지바하라 한역, 조환기 번역|K.619, T.1613|loc=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1372&startNum=11 11 / 24]. 살가야견(薩迦耶見)|quote=<br />"무엇을 살가야견이라고 하는가? 5취온에 대해서 집착함에 따라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오염된 지혜를 성질로 한다. 살(薩, sat)이란 깨어지고 부서진다는 뜻이다. 가야(迦耶, kaya)란 화합하여 쌓임의 뜻을 말한다. 즉 이 가운데서 하나[一]라는 견해, 영원[常]하다는 견해, 다른 온이 나라는 온으로 있고, 나의 것 등이라고 한다. 어떤 까닭으로 다시 이와 같이 말하는가? 살이란 영원하다는 생각을 깨트리고, 가야란 하나라는 생각을 깨트린다. 영원히 쌓여 있는 것이 없어 이 가운데서 나와 나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염된 지혜란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견해의 종류들이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이에 따라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는 '[[허위]]의 [[신 (불교)|신]](身, 즉 '나' 또는 자아)에 대한 견해', '깨어지고 부서지는 [[신 (불교)|신]](身, 즉 '나' 또는 자아)에 대한 [[견해 (불교)|견해]]', '[[허위]]의 [[적집]]에 대한 견해' 또는 '[[무상]]의 [[적집]]에 대한 견해'의 뜻으로 해석되어 '''허위신견'''(虛偽身見){{.cw}}'''괴신견'''(壞身見) 또는 '''위신견'''(偽身見)이라 명명된다.{{sfn|세친 조, 현장 한역|T.1558|loc=제19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29n1558_p0100a01 T29n1558_p0100a01 - T29n1558_p0100a13]. 유신견(有身見) 또는 살가야견(薩迦耶見)|quote=<br>"執我及我所是薩迦耶見。壞故名薩。聚謂迦耶。即是無常和合蘊義。迦耶即薩名薩迦耶。此薩迦耶即五取蘊。為遮常一想故立此名。要此想為先方執我故。毘婆沙者作如是釋。有故名薩。身義如前。勿無所緣計我我所。故說此見緣於有身。緣薩迦耶而起此見。故標此見名薩迦耶。諸見但緣有漏法者。皆應標以薩迦耶名。然佛但於我我所執摽此名者。令知此見緣薩迦耶。非我我所。以我我所畢竟無故。如契經說。苾芻當知。世間沙門婆羅門等。諸有執我等隨觀見一切。唯於五取蘊起。"}}{{sfn|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loc=제19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214&startNum=867 867-868 / 1397]. 유신견(有身見) 또는 살가야견(薩迦耶見)|quote=<br>"5취온에 대해] 아(我, 즉 나)·아소(我所, 즉 나의 것)라고 집착하는 이 같은 견해를 일컬어 살가야견(薩伽耶見, satkaya-dṛṣṭi)이라고 한다. 즉 허물어지기 때문에 '살(sad=saT>'이라 하고, 취집된 것이기 때문에 '가야'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무상한 화합온(和合蘊)의 뜻으로, '가야(화합온)'가 바로 '살(무상)'이므로 살가야라고 이름하였다. 곧 이 살가야는 바로 5취온으로, 영속[常]과 단일[一]의 관념을 비판하기 위하여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요컨대 [영속 단일론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선행시키고 난 후에 비로소 자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sup style="color: blue">36)</sup>
<br>이에 대해 비바사자(毘婆沙者)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실재하는 것[有]이기 때문에 '살(saT>'이라 이름하고, 신(身, 즉 가야)의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어떠한 소연도 없이 아(我)와 아소를 헤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은 실재하는 신[有身]을 소연으로 한다고 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살가야를 소연으로 하여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한 견을 살가야견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
<br>온갖 '견'으로서 다만 유루법을 연으로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살가야'라는 명칭으로써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단지 아와 아소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만 이 명칭을 나타낸 것은 이러한 견해는 살가야(즉 5취온)를 연으로 하여 일어는 것으로, [그것이 진실의] 아와 아소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아와 아소는 필경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세간의 사문과 바라문들로서, 자아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이 두루 관찰하는 일체는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sup style="color: blue">37)</sup>
<br><sup style="color: blue">36)</sup> 보광이나 법보 모두 이를 경부사의 해석으로 평석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살가야를 동격한정복합어(持業釋)로 해석하여 무상의 오취온이라 하였다. 따라서 살가야견은 비실재인 허위의 5취온에 대한 지식이다.(이 경우 壞身見·虛僞身見으로 번역됨), 이 때 견의 소연은 실재하지 않으며 단일하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견해 『대비바사론』 (권제8, 대정장27, p. 36상 ; 한글대장경118, p. 167) 상에서 비유자(譬喩者)의 주장으로 전해진다. "살가야견은 실재적인 대상[實所緣]을 갖지 않는다. 곧 살가야는 실재적인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주장이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아와 아소는 실재하지 않는다.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보고, 나무 그루터기를 사람 등으로 착각하듯이 이것 역시 실재적 대상을 갖지 않는 인식[見]인 것이다." 이에 반해 유부에 의하는 한 살가야견은 실재하는 오취온(즉 有身)에 대해 그것을 '아' 등의 단일한 실재로 파악하는 그릇된 지식이란 뜻이며, 그래서 보통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하는 것이다.(후술)
<br><sup style="color: blue">37)</sup> 『잡아함경』 권제2 제45경(대정장2, p. 11중), "만약 사문과 바라문이 자아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두 바로 이러한 5음(陰)에서 자아를 보는 것이다." 즉 아와 아소에 대한 주장을 일으키는 것은 뭔가 특별한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오온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
* [[이전]](移轉) 즉 '[[상속 (불교)|상속]]하면서 [[전변]]한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로,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견해이다. 이에 따라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의한 [[인연화합]]의 산물로서 [[상속 (불교)|상속]]하고 [[전변]]하는 [[신 (불교)|신]](身, 즉 '나' 또는 자아)에 대한 [[견해 (불교)|견해]]' 또는 '[[상속 (불교)|상속]]{{.cw}}[[전변]]하는 [[5온]]의 가화합체에 대한 [[견해 (불교)|견해]]'의 뜻으로 해석되어 '''이전신견'''(移轉身見)이라 명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