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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한 브랜트는 독립적인 전사단을 모집하기 위해 봄에 오노쿠아가로 돌아갔다. 일부 오노쿠아가 마을 사람들이 그와 합류를 했지만, 5월에는 반군에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왕당파를 모집하는데 성공했다. 이 무리는 브랜트 자원부대로 알려지게 된다. 6월에는 그들을 이끌고 우나딜라로 보급품을 얻기 위해 갔다. 그곳에서 브랜트는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트라이언 카운티 민병대와 마주치게 된다. 허키머는 이로쿼이 부족민들에게 중립을 고수하라고 요구했지만, 브랜트는 이들이 왕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인디언이라고 응답했다. 그들은 영토에서 유럽인들을 축출하고 싶었다.
 
==이후==
브랜트는 전쟁에서 지도자였지만, 모호크 족의 추장을 잇는 핏줄이 아니었다. 그러나 브랜트의 타고난 능력과 초기의 교육, 그리고 인맥으로 부족과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브랜트의 일생에 걸친 임무는 문화의 전환기에 발생한 인디언을 생존하게 하고, 미국 역사의 가장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및 경제적 도전을 극복하게 했다. 브랜트의 인생을 요약하면 성공과 좌절의 반복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브랜트의 인생은 좌절과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젊은 전사, 학생, 농부,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서 또는 영국군 장교, 영국 교회의 신자, 신약 번역자 등 많은 역할을 해냈다. 캐나다에 있는 부족의 땅에 대한 영국 장교와의 분쟁은 독립 전쟁 후 상대가 미국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더 심각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1792년과 1797년에 [[조지 워싱턴]]과 [[헨리 녹스]]에게 초대를 받아 [[필라델피아]]에 갔는데, 그 서부 동맹과 미국인들을 화해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인디언들은 1794년 [[폴른 팀버스 전투]]에서 패배를 당했다. 서부 동맹의 유대는 [[1795년]] ‘[[그린빌 조약]]’으로 깨져버렸다.
 
조셉 브랜트는 1807년 11월 24일, 온타리오 호수 북쪽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이 위치는 온타리오 주 벌링턴 시가 되었다). 브랜트의 조카 존 노턴에게 말한 마지막 말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삶을 반영했다. “가난한 인디언에게 자비를 가져라.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으면, 그것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라.” " 그의 주택은 19세기 말까지 브랜트의 자손이 사용하다가 현재는 조셉 브랜트 박물관이 되었다. [[1850년]], 브랜트의 유골은 34마일 (55 km)의 거리를 그랜드 강 젊은이의 어깨에 실려, 프랑트 포드 모호크 교회의 무덤으로 옮겨졌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