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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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
|상태 = 1-4호기: 심각한 손상, 기능 상실</br> 5-6호기: 경미한 손상, 가동 중지
|착공 = [[1967년]] [[7월9월 25일29일]]
|상업운전 =[[1971년]] [[3월 26일]]
|운전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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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는 [[1967년]] [[9월 29일]]에 착공하여 [[1971년]] [[3월 26일]]에 개업 한 핵 시설이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착공 한 [[1960년대]]는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에 한창이며, 또한 세계에서 [[핵 실험]]이 잇따라 있던시기였다. 즉, [[2011년]] [[3월 12일]]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폭발 사고]]는 "''고도 성장기의 부의 유산''" 이라고도한다.
 
건설시에는 [[하마도리]]의 [[이와키 시|요쓰쿠라]] 출신 인 [[기무라 모리에]]({{lang|ja|木村守江}}) [[후쿠시마 현]] 지사와 [[나카도리]]의 [[다테 시 (후쿠시마 현)|야나가와]] 출신 인 [[키카와다 카즈타카]]({{lang|ja|木川田一隆}}) [[도쿄 전력]] 사장이 결탁했다. 착공 당시, [[오쿠마 정|오쿠마]]와 [[후타바 정|후타바]]는 이주가 많은 등 과소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오쿠마과 후타바의 행정 당국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기무라 모리에에 지역 진흥 대해 고민을 털어했는데, "[[원자력 발전소]]가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키무라에서 답변했다. 이것이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시작이다.
 
따라서 키무라와 키카와다이 공모 수 있었던 요인은 "'''후쿠시마 현'''"이라는 접점이 있었다. "후쿠시마 현"라는 접점에서 손을 잡고, 후쿠시마 현의 소외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명칭이 "'''''오쿠마'''''"대신 "'''''후쿠시마 제1'''''"이 된 것도이 공모가 배경에 존재했다. (※ 후쿠시마 현 이외의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는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오나가와]]''"나 "''[[하마오카카시와자키 카리와 원자력 발전소|하마오카카시와자키 카리와]]''"라는 도시 이름인지, 도시의 1지구 이름이다.)
 
또 1호기 소재지 인 오쿠마는 구 성시인 [[이와키 시|타이라 (이와키 시)]]와 [[소마 시|나카무라 (소마 시)]]에서 등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쌍방에서 [[국도 제6호선 (일본)|국도 6호선]]에서 48km 떨어져있다. 원자로는 가장 타이라 측에 4호기가, 가장 나카무라 측에 6호기가 배치되어 있으며, 타이라 측부터 4호기, 3호기, 2호기, 1호기, 5호기, 6호기가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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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일본계 미국인 검시관 스가오카 케이는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원전 원자로 균열 사고를 은폐하고 있다고 감독당국에 알렸다. 그러나 당국은 오히려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도쿄전력에 알려, 그가 업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ref name=ha/>
 
===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폭발 사고 ===
{{본문|후쿠시마 제1 원자력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위키뉴스|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2011년]] [[3월 12일]],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도호쿠 지방 태평양 앞바다 지진]]과 그로 인한 쓰나미의 여파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냉각 시스템이 고장나면서 폭발 등으로 대파되어 가동 중지되었으며, 이 사고는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 7등급 사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