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림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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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대 시절에 그는 처음으로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 방송진행자, DJ 가 되었다. 이때 그는 '러스티 세이프' 라는 이름을 썼다. 1969년, 그는 [[미주리주 서동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단 2학기만을 마치고는 그만 두었다. 그의 어머니는 [[대학교]]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라디오를 빼고는 아무것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고요."
[[1972년]], 대학을 중퇴한 후, 러시 림보는 [[펜실베니아 주]] [[맥키스포트]]로 가서 그는 [[피츠버그 시]] 주의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 라디오 DJ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디스크 자키 일을 [[1979년]]까지 했다. [[1979년]]에는 그 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켄자스 시 로얄 야구 팀의 감독으로 이적했다.
=== 방송 활동 ===
==== 라디오, 방송 진행 활동 ====
[[1984년]]부터는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지역방송국]]의 [[라디오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다. [[1988년]]부터는 [[ABC 라디오]]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이때 [[미국]] 방송계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겼는데 그건 이른바 논쟁적인 문제의 경우 반드시 찬반을 함께 다뤄야 한다는 방송공정성 원칙이 폐기가 된 것이었다.
[[1988년]] 드디어 [[뉴욕]]으로 옮기고 난 뒤에 맡은 '러시 림보 쇼'는 인기를 구가하여 그 해의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1988년]]에 시작한 토크쇼인 [[러시 림보 쇼]]는 600개 [[라디오 채널]]을 통해 정오부터 3시간 동안 전국에 생방송되며 주당 청취자 수가 평균 2000만 명에 이른다.<ref name="ddioske">[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50000000375/3//20090305/8703959/1 美공화당 리더는 ‘라디오 스타’ 림보?] 동아일보 2009.03.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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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LA 폭동]] 때에는 백인 경찰에게 맞는 건 별 문제가 아니라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95년]]에는 타임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했다.<ref name="ddioske"/>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공화당 (미국)|공화당]]의 선거운동원을 자원했지만 [[빌 클린턴]]에게 패하였다. [[2000년]] 이후에도 계속 라디오 진행을 맡았지만 [[2001년]] 청력을 잃고 와우각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2003년]] 잠시 요양하였다. 이후에도 라디오DJ와 프로그램 진행자를 계속 맡고 있다.
한편 가정 해체와 동거, 마약 등의 원인을 [[남성혐오|남성혐오증]]에 걸린 [[여성우월주의]]자들 때문이라고 지적하여
=== 2000년대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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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경선 당시 [[존 매케인]]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닌 매케인은 절대 공화당 부호가 될 수 없다면서 낙선운동을 벌였지만 실패했다.<ref name="s400s"/> 경선 이후 매케인이 대통령, 페일린이 [[부통령]] 후보자로 정해지자 계속 선거 유세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나는 그가 실패하길 바란다'며 조롱하였다.
흑인 첫 [[공화당 (미국)|공화당]] 전국위원장인 [[마이클 스틸]] 위원장은 림보 씨의 “대통령이 실패하기를 바란다”는 발언에 대해 “선동적(incendiary)이고 분열적이고 추악한 엔터테이너일 뿐”이라고
== 다양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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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널드 레이건]]
* [[조지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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