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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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순핑크 크릭 승리===
트렌턴에서의 실패를 앙갚음하기 위해 영국군의 뉴저지 방면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찰스 콘월리스 장군은 뉴욕을 떠나 워싱턴 군에 대항하기 위해 뉴저지의 프린스턴에 9,000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콘월리스는 프린스턴에 [[찰스 모후드]] 중령에게 1,200명의 영국군을 맡겨 남겨두고, 워싱턴 군 6,000명을 잡기 위해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월 2일]] 출발했다.<ref name="fischer404" /><ref>Lengel p.199</ref> 워싱턴은 접근하는 영국군의 행보를 지연시키기 위해 엄청난 병력을 파견했다. 영국군이 트렌턴에 도착한 것은 거의 날이 저물어서였다.<ref>Lengel p.200</ref> 콘월리스 부대는 대륙군이 방어하는 애순핑크 크릭에 놓인 다리를 세 번이나 건너는데 실패하자, 다음날까지 공격을 연기하기로 했다.<ref>Lengel p.201</ref>
 
===탈출===
그날 밤, 워싱턴은 장교들을 불러 작전 회의를 소집했다. 워싱턴은 장교들에게 방어전을 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아니면 도하를 하거나, 또는 프린스턴을 기습하기 위해 뒤로 돌아갈 것인지를 물었다.<ref>Ketchum p.293</ref> 이미 그런 생각을 또열렸지만, 그는 아서 세인트 클레어와 존 캐드월래더가 프린스턴을 기습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1776년 12월말에 실제로 효과를 본 두 건의 정보 수집 노력은 그러한 기습 공격을 뒷받침 해주었다. 장교들과의 상담을 한 이후, 그들은 프린스턴을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사항이라는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ref>Ketchum p.294</ref>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