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아 리비에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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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군의 준비===
불과 몇 백명의 군인을 실은 3척의 영국 함선의 도착으로 토마스 부대가 철수한 이래, 토마스는 영국군의 정확한 세력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5월 21일]] 소렐에서 열린 전략 회의에는 [[제2차 대륙회의]]의 대표도 나와 있었지만, 트루아 리비에르와 퀘벡 시 사이에 데샹보에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영국군의 세력에 관한 막연한 보고였던, 소문에 근거하여 내린 것이며, 군인이 아닌 대륙회의의 대표가 결정을 주도했다. 토마스는 [[5월 21일]] [[천연두]]에 걸려, [[6월 2일]] 결국 사망했고, 군대의 지휘는 단기간 [[윌리엄 톰프슨]]에게 이행되었지만, [[6월 5일]]에 [[존 설리번]]이 타이컨더로가에서 원군을 데리고 도착하자 그로 교체되었다.
 
[[6월 5일]], 설리반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에 톰프슨은 [[아서 세인트 클레어]] 대령의 지휘로 600명의 부대를 트루아 리비에르 방면에 파견하였다. 소수라고 믿었던 영국군을 급습해 해산시키려 했다. 설리반은 소렐에 도착했을 때에, 즉석에서 톰프슨에 1,600명을 붙여 그뒤를 쫓게 했다. 이 부대는 니콜렛에서 세인트 클레어 부대를 따라 잡았고, 다음날 강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6월 7일]] 밤, 톰슨은 세인트 클레어와 약 2,000명의 부대가 강을 건너 트루아 리비에르에서 몇 마일 상류에 있는 ‘포인트 뒤 랙’(''Pointe du Lac'')에 상륙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