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제2차 만세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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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2월]] 허정숙은 12월 중순 경에 최복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기도했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 발각되어 실패한다. [[1929년]] [[12월 13일]]에는 [[신간회]]의 민중대회 계획이 누설되어 20명이 체포된 민중대회사건, 또는 허헌 사건이발생, [[허헌]]도 수감되었다.<ref name="shinyoung152"/>
 
[[허정숙]]은 다시 연락망을 구성하여 [[1월]] 중순 만세운동 거사날자를 잡고 유인물과 태극기를 등사하여 살포한다. 이화여고보를 비롯한 시내 공사립 여자고등보통학교와 그밖에 중등학교 등 13개교가 일제히만세를 부른 여학생 만세운동 결과, 구속자 34명에 불구속자 55명이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그들 모두가 여학생이었다는 점이 당시 사회의 커다란 관심거리로 주목받았다.<ref name="shinyoung152shinyoung153">신영숙,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0호 (1996년 6월호)》 (역사학회, 1996) 153페이지</ref>
 
== 계획과 전개 과정 ==
[[허정숙]]이 고문으로 지도했던 이 만세시위 운동은 각교 학생대표회가 학생 시위 계획을 사전에 수립, 1월 초순 제3학기가 시작되는 [[1월 15일]] 아침에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시가행진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잡히더라도 일체 이름을 밝히지 말 것과 유치될 경우에는 단식을 행하자는 3개 항의 결의를 했다고 한다.<ref name="shinyoung153"/> 이때 [[동아일보]] [[1930년]] [[2월 16일]]자에 의하면 허정숙은 허정자로 나오기도 하고 학생대표 준비모임에는 남학생 대표도 다수 참가하였다.<ref name="shinyoung153"/>
 
이 사건의 주모자로 허정숙은 징역 1년의 언도를 받은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산고로 말미암아 일시 형집행정지를 받았다가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부친 허헌과 함께 복역, 1932년 3월 18일에 만기 추록하였다.<ref name="shinyoung153"/>
 
== 구속 인원==
구속된 인원은 [[근우회]] : 허정숙, [[박차정]], [[이화전문]] : 이순옥, [[이화여고보]] :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함덕훈, 임경애, 윤옥분, 김복림, 최현수, 안임순, 이옥련, 양원숙, [[동덕여고보]] : 홍옥인, 고옥경, 박선숙, 한정희, 허복록, [[숙명여고보]] : 박선봉, 조금옥, 조종옥, [[경성여자상업학교]] : [[송계월]], 김귀임, 실천여학교 : 김경숙, [[정신여학교]] : 하운학, 근화여학교 : 김귀인복, 김순례, 최성반, 김금남, 김연복, 이충신, 태화여학교 : 정태이, 여자미술학교 : 박계월 등이었다.<ref name="shinyoung153"/>
 
== 결과 ==
동아일보 [[1930년]] [[2월 20일]], [[3월 19일]], 23, 24, 26일자의 재판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최복순외 7명에게 징역 7~8개월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여학생이라는 점을 감안, 비교적 가볍게 해 주었다.<ref name="shinyoung153"/>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