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4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경제: illustrating the fact in a neutral manner.
66번째 줄:
 
== 경제 ==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하의 70년대에도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77년부터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됐는데,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우선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경제구조에 균형이 잡히고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여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됐다. 1973년에 준공된 포항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의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면서 [[공업진흥청]]을 신설했다. 같은해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했다.<ref name="qkrwjdgml"/> 70년대에는 중동의 석유수출국가들이 석유가격을 인상하여 경제발전에 압박을 가하였으나 수출은 꾸준히 지속되어 1977년에 100억 달러, 1981년에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수출상품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어섰다. 그리고 공업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5%를 상회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건설업체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외화를 버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전체적으로 60년대와 70년대의 수출신장률은 연평균 40% 정도, 경제성장률은 8.9%를 기록하여 세계적으로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여 국민의 자존심을 부추기고, ‘하면 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박대통령의 강력한 신념과 개발독재형의 지도력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그리고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성취욕, 그리고 수천년 간 선진문명을 꾸려온 문화적 잠재력이 되살아난 것이것 또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대외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의존성의 심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오는 산업불균형,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에서 오는 부패의 만연, 지역발전의 편차, 농촌의 피폐와 도시빈민층의 형성, 공해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이러한 모순점이 재야 및 학생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